*만약에 / 전재복

만약에 시간을 거슬러 전생 어디 쯤에 살아진다면
사대부 양반가의 정경부인 따위 나는 싫소
가슴에 불도장을 수천 번 찍어 거북등같은 딱쟁이에
심장을 가둔 공로로 허울좋은 또 하나의 족쇄
효자문 열녀문에 갇히는 건 더 더욱 싫소

시간을 거슬러 내 맘대로 살아진다면
詩畵歌舞에 뛰어난 기녀가 되고싶소
自足에 눈먼 사내들 눈 아래에 두고
참 멋을 아는 이 아니면 실눈도 뜨지 않으리
사랑 하나에 목숨걸고 뜨겁게 불타올라 죽어도 좋으리

청암절벽 높푸른 솔이 되어 걸림없는 바람을 품어보고
창공을 찌르는 대나무 되었다가 맑은 곡조 풀어내는
퉁소가 되어도 좋겠소

나 전생의 어디 쯤 살아진다면 너 아니면 죽겠다는
당신을 꼭 만나 빠꿈살이같은
철부지로 살아도 좋겠소 욕심없이 소박한 사랑에
눈 멀어 살아도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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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 한강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걸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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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혹은 /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 시집 <숨어서 우는 노래>(조병화,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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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라는 사내 하나/신달자

내 집에 사내 하나를 들여놓았다
속은 의뭉스럽지만 뚝심은 있어
냉정한 수모도 태연하게 받아들여
날카롭게 밀쳐내도
다시 무표정하게 제자리를 차지하는
그 덤덤한 사내를
아예 내 집에 눌러 앉히기로 했다
깨끗한 베개 위에 그의 머리를 쉬게 하리라
사귄 지는 오래지만 늘 괴팍하게 등 돌리며
죽기 살기로 피할 만큼 피해 보았지만
세월 탓인가
손 한번 잡지 않고 눈 맞춘 적도 없지만
은근히 내 몸까지 읽고 있는
그 사내에게 더는 잘난 척할 게 나는 없다
요즘 들어 부쩍 손놀림이 강해
민망할 정도로 음탕하게 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순전 깡으로 내 몸을 파고드는 사내 하나
내 건조증의 등이라도
긁어주기나 할까 몰라
고독! 너도 사내가 되기는 될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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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위로하는 한 권의 그림책 - 지친 일상에서 그림책으로 내 마음 읽기,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그림책사랑교사모임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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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로 선정된 그림책이 소개가 되어 있다.
교사들의 다양한 고민과 해결해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위로 받고 싶은 모두가˝ 이 책 읽기를 추천합니다.짧은 수업시간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인내가 고스란담겨있어 감동을 주는 책.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고 있구나라고 느껴지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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