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 한강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걸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