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판
티마이오스

p.10 끄라비

팜오일 향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내 옷들을 알록달록하게 흔들었다.

p.254 어떤 고요

꼴값을 하느라 코피까지 흘렸다. 평소엔 맞아서 흘리던 피였다. 나올 마당이 아닌데 나온 피 입장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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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1.
현실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들을 묘사하는데 탁월하신 것 같다. 특히 [오직 두 사람] [아이를 찾습니다] [최은지와 박인수]가 인상깊었는데 각각 살펴보자면,

[오직 두 사람]
아빠와의 고립된 관계를 언어에 빗댄 점,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를 찾은 그 후의 삶에 대한 것,
[최은지와 박인수]
이론적으로 도덕적인 것과 현실에서 받아들이는 것의 간극, 그리고 그것을 지켜야하는가의 묘한 갈등.

2.
물론 뚝 끊기는 단편에 익숙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지만 모든 글들이 결론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재가 분 뜨지 않고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면서도 허구인 것 같은 느낌이 새로웠다.

3.
예능의 영향인가 읽다보니 작가의 말투가 그대로 묻어나는 듯한 느낌?


4.
부산여행을 하면서, 추리문학관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장소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글 자체는 흡인력이 있고 단편모음집이라 여행에 들고가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다른 장편집을 하나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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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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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캐릭터의 대사를 여성 목소리로 읽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여성임에도 읽으면서 이건 좀 억지 설정이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는데 이 점이 저자가 원하던 바가 아닌가 싶다. 현실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남녀만 뒤집어 놓으니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들은 아마 현실에서도 실은 이상한 부분이겠지.

2.
맑시즘과 페미니즘의 관계는 새로웠다.

3.
책의 도입부분이 주인공 페트로니우스가 쓴 책의 도입부분으로 남녀만 뒤바뀐 채 서술된다.이갈리아에 겨우 적응했나 싶다가 오리려 현실을 묘사한 그 부분을 보니 현실이 이상해보이더라. 이 책의 묘미는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4.
1977년 노르웨이에서 나온 책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이런 논의가 우리나라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점이 부각되는 것 같아서다. 요즘 페미니즘이 매우 뜨거운 감자인데, 진흙탕 싸움에 잘 분간이 되지 않는 문제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논의될 지점과 핵심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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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교회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들을 실현하려고 고군분투했던 이들의 이야기
한국 근현대사에서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민감하게 대응했던 소수의 그리스도인

p.88

... 산짐승들의포효도 무서웠습니다. 기도에 집중하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자괴감이들었습니다. 고명하신 목사님들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하는데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얇은 모포 한 장 걸친 채 울기만 하던 그녀는 불현듯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 나의 이름을 불러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이상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셔서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조수옥은 두려움을 직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을 선택했습니다. 산기도를 통해 용기와 힘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지키고자 밤새 울며 와룡산에서 울부짖었습니다.

p.109-110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국기배례 거부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었습 니다. ••• 이들의 저항이 비록 민족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는 포함되지 못하더라도 역사적 의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보수교단은 내면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뿌리로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보수교단이 점차 경직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차이도 용납하지 못한 채 진리 수호라는 명목으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신학적 견해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상대방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특정한 신학이 아니면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상검증은 제국일본이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옥죄었던 방식입니다. •••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권력에 맞섰던 이들의 후예들이 도리어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p.154-156

1960년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비판적 자유주의‘의 담지자였습니다. ••• 바로 하나님 형상에 뿌리를 둔 자유였습니다. 즉, 인간의 본질은 자유인데 그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형상에서 기인한다는 설명입니다.
•••
김재준의 인간 이해에서 ‘자유‘가 중요한 만큼 죄는 ‘자유의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바로 자유가 상실된 인간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체제를 찾습니다. 그가 볼 때 최선의 선택은 자유민주주의였습니다.
•••
이것은 권력이 공공적 가치와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의 선례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p.203-204

우리가 함께 살펴본 관광기생, 원폭피해자, ‘위안부’ 피해자들은 한마디로 유령이었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뜻인데, 이들은 온전히 머물 데가 없었습니다.
•••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입니다. 비가시적인 타자를가시적인 존재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장소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겁니다. 자리를 준다는 건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인정한다는 뜻이죠. ••• 다시 말해 환대는 인격을 부정당하여 사물로 취급받고 있는 타자에게 상징적인 가치를 되찾아 줌으로써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듭니다.
교회여성연합회의 인권운동은 한마디로 환대의 구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교회여성연합회는 ‘장소‘를 갖지 못해 배회하는 이들에게 머물러도 좋은 자리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란 배제된 존재를 인정하는 환대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35

기장청년회 전국연합회는 김종태가 생전에 쓴 글들을 모아 작은 문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형제들, 빈민굴에 사는 형제들, 공장에서 자유를 빼앗긴 채 일하는 형제들을 위해 그가 기도하며 쓴 시가 있습니다.

어느 환자의 기도 - 김종태

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이야말로
당신이 보여주시던 기적의 행렬이 아니겠습니까
주여, 이들을가엾게 여기소서
이들은 미약한 인간이오니 온갖 고통을 맛보신 주님!
위로해 주소서
(중략)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진리의 빛으로이 어둠을 비추소서
모든 고통을 당하는 나의 형제들을 위해 나의고통을 주님께 바치옵니다.

『모임터」라는 회보에 실은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그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301
예언자적 거리두기

기독교의 정치참여 문제와 관련하여 6월 항쟁은 ‘예언자적 거리두기‘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얘기할 때 ‘예언자적 거리두기‘는 흔히 간과하는 부분입니다. 예언자적 거리두기란 궁극적인 충성을 정치 세력에 바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예언자적 거리두기가 아무것도 행동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겁니다.

p.305-306

불의한 문제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양심의 자유를 증언하고 있는가.
•••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다른 이의 아픔과 절망을 부둥켜안고 우는 울부짖음에 가까웠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를 증언하였습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선포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불의에 저항하는 주체로 부름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저항의 몸부림을 하며 절망과 싸우는 존재인 겁니다. 나사렛 예수도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생애는 저항의 몸부림이라는 관점으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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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6
뇌파 청진기

p.185

"안녕하세요? 눈보라뒤에 주민 손미주입니다. 배틀원을 야만적인 격투로 취급할 것인가 신사적인 스포츠로 간주할 것인가는 중요한문제가 아닙니다. 로봇 기술에 의지하는 인류 문명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자본 그리고 권력과 결탁한 기술은 인간에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 번 양보해서 신사적인 스포츠를 통해 로봇 공학 기 술을 발전시킨다고 해도, 그 결과물인 로봇은 결국 우리에게 폭력적 인 삶을 선사하고 말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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