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에서, 정숙함에 해당하는 말은 ‘쯔니웃tzniut’이다. 이는 내적으로는 겸손함, 외적으로는 율법이 정하는 옷차림을 지키는 것, 둘 다를 가리킨다. 이에 관해 아하바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해 주었다.
"쯔니웃은 단순히 옷 입는 법에 대한 규칙 그 이상이에요. 그 속에 있는 사상은 옷을 입을 때 외적 자아로 주의를 끌지 말라는 거죠. 그대신 내적 자아가 당신의 옷차림을 통해 빛나도록 하라는 거예요. 예쁘게 옷을 입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똑같은 옷을, 그것도 구질구질한 옷을 계속 입고 다니는 건 정숙한 옷차림에 도움이 안 되죠. 구질구질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낼 사람이 있을까요." ••• "쯔니웃은 행동 양식이기도 해요. •••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고 애쓰지 않는 거예요. 또는 주목받으려고 억지로 앞에 나서지 않는 거죠. 신상품, 가장 좋은 물건은 남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사람들이 쓰는 도구죠. 하지만 쯔니웃의 방식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 P182
사실 성경에서 정숙함에 대해 가르치는 대부분의 본문은, 성적인 맥락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와 맥락이 닿아 있다. 오늘날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이 단어를 말하는 설교자들이 못 보는 지점이다. 나는 다리와 가슴골을 잘 간수하라는 설교는 수없이 들었지만, 장신구를 고를 때 불공정하고 약탈적인 교역을 통한 제품은 피하라는 말은 못 들어 보았다. - P189
그러다가 깨달았다. 어쩌면 그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는 방식이었다는걸, 어쩌면 그런 생각들은 보수적으로 옷을 입는 사람들을 볼 때 내 마음에 스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보며 자동적으로 학대와 통제를 떠올렸다. 그 사람이 입은 옷으로 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얄팍한가.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지위에 맞게 입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기업체 사장들은 면접자가 찢어진 청바지에 지저분한 티셔츠를 입었다면 고용하려고 할까? 우리가 특정 복장과 특정 행동, 특정 생활 방식을 연관 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옷은 비언어적 소통의 한 형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이 말하는 것을 봐야 하지 않을까? - P192
참된 정숙함은 옷이나 장신구, 화장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찬양하는 이 미덕은 포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겸손, 자제, 소박함, 쯔니웃, 겔라센하이트 등 그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는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성문화하고 법을 정한다. 여자애들을 교실 앞으로불러 세워서 다리가 얼마나 드러났는지 자를 대 보고 몇 센티미터의 정숙함을 지녔는지 재려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규칙들에 너무 익숙해지고 규칙은 원래 목적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 그 정신을 수련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문자에 매달린다.
대개 이는 역효과를 낳는다. 구별되려 했는데 획일적으로 되고, 소박해지려 했는데 남들의 눈길을 더 끈다. 성을 잘 제어하려고 했는데 의도하지 않게 오용한다. 죄를 피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죄를 만들어 낸다.
어쩌면 그래서 바울은 여성들에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라‘고 권고했는지 모른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했는지 모른다. 또 잠언 31장의 용맹한 여인은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개역개정)아 칭찬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입느냐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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