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구원에 대한 더 깊은 이해)

p.153
그분이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분의 구원 사역에 기초해 살아간다는 의미를 이보다 더 생생히 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 가지 방식으로 잔치를 경험할 수 있는데, 각각 우리 삶이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빚어지는 방식에 상응한다.
p.155
그러나 구원은 객관적이고 법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적이고 체험적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 감각적 어법을 고집한다. 그래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믿고 동의하는 데 그리지 말고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한다.
p.158
이 세상은 그저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 쓰이는 연극 무대가 아니며, 모두들 천국에 가고 나면 결국 버려지고 말 곳이 아니다.
p.161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분의 창조세계에 침입한 이 모든 타락상이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거라는 징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사회 구조를 개혁하여 안전한 거리와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일을 한 문장 안에 함께 말할 수 있다.
p.161-162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난했다. 종교라는 진정제 때문에 사람들이 불의에 대해 수동적인 채 "사후의 천국"만 바란다는 것이다. 물질세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환영이라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에는 그 말이 해당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이 물질세계의 고난과 압제를 심히 미워하셔서 기꺼이 그 속에 들어가 그것과 싸우셨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독교는 결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들게 하는 명약이다.
p.163
칭의와 희망과 의미와 안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찾으려는 게 우리의 습성이자 본능이다.
p.174
결국 마르틴 루터의 옛 강령에 여전히 핵심이 잘 압축되어 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어떤 행위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얻어 낼 수 없다. 다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음을 믿고,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희생적으로 우리를 섬기신 분을 참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도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해결책은 지금부터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못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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