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4

세 여자를 감싸고 있는 경성의 공기가 여름 햇볕과 젊은 혈기에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랐던 나이 스물, 두려움도 비겁함도 없었던 그 시절을.

p.21

열여덟 나이에 강연을 다니며 여성계몽운동도 해봤지만 정숙의 야심은 그 이상이었다. 정숙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맹수 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 민족을 구할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p.23

정숙은 꾹 다문 입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녀는 처음 아버지에게 도전했고 첫 회전에서 승리했음이 분명했다. 그해는 기미년이었고 그것도 일종의 만세운동이었다. 거리에서 여럿이 부르는 만세보다 집 안에서 혼자 부르는 만세가 더 어려운 법이다.

p.270

실제로 이 남자는 깊은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건 어느 순간에도 손을 놓지 않는 그런 것이다. 앞에 놓인 것이 낭떠러지일지라도. 적어도 헌영과 세죽은 그러했다. 처음에도 지금도. 세죽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단야가 과연 명자를 사랑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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