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00
무엇인가 끔찍한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단절된 장소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반면에 닐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축에 속했다. 그가 보는 한, 집단으로서의 지옥의 망자(亡者)들은 지금의 그보다 더 불행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생활은 인간계에서의 자신의 생활보다 더 나쁘지도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낫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영원한 육체는 선천성 기형이라는 제약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314
닐 자신도 휴머니스트 운동의 팸플릿 하나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기억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타락 천사들에 관한 언급이었다. 타락 천사들의 강림은 드물었고, 행운도 악운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들은 신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하면서 인간계를 잠깐 지나가기만 할 뿐이다. 그들이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질문을 하곤 했다. 당신들은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타락 천사들의 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너희들의 일은 너희가 결정하라. 우리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다. 너희들도 우리처럼 하면 될 것이다.>
p.333
닐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모든 신비는 이제 풀렸다. 삶은 모두 사랑이며, 고통조차도, 아니 특히 고통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를 지옥으로 보냈다.
p.335
대다수의 주민들 입장에서는 지옥은 지상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벌은 살아 있었을 때 충분히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회오이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견딜수 있었다. 그러나 닐의 경우 지옥은 인간계와는 아무런 유사점도 가 지고 있지 않은 장소였다. 닐의 영원한 몸에는 정상적인 두 다리가 달려 있었지만, 그가 그것을 자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두 눈도 복원되었지만, 닐은 눈을 뜬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천상의 빛을봄으로써 인간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얻은 그는, 지옥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신의 부재(不在)를 자각했던것이다. 닐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일은 비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이 고통은 인간계의 고통과는 달리 신의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니라 신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닐은 살아 있을 때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한 고뇌에 시달렸지만, 그가 보이는 유일한 반응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닐은 여전히 사라를 사랑하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보고 싶어하지만, 그녀와 재결합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생각은 그를 한층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닐은 자신이 지옥으로 보내어진 것이 그가 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고차(高次)의 목적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신에 대한 닐의 사랑이 줄어드는 일은 없다. 설령 닐이 천국으로 받아들여지고 고통이 끝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런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닐은 자신이 신의 의식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신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그의 감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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