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기공성

p.99

자연과 인간, 기계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 대해 제가 의혹하는 것은, ‘영혼의 숨구멍’ 때문이에요. 오직 인간만이 이 영혼의 숨구멍을 의지적으로 닫을 수도, 열 수도 있는 존재니까요. 나는 개체로 독립적이지만 이 기공성 때문에 내 의지로 ‘너‘를 받아들일 수있어요. 얼마만큼 받아들일지는, 결국은 내가 정하죠. 네가 아 무리 내게 와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의 존재는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이건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들어오시려고 하나 우리가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실 수없는 것‘과 같아요(계 3:20 참조). 내 존재의 숨구멍을 열고 닫는건 내 맘, 내 의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열고 닫는 것을 결정하는 내 주체가 없으면 곤란해요. "갈고리에 걸린 지렁이"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형상을 포기하는 죄이 죠. 그래서 결국 남자든 여자든 주체여야 해요.

p.99-100

주체로 선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존재의 숨구멍을 통해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상호적일 수 있다는 것이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이 고백하는 생명의 법칙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건네주고 받아들이면서 생명은 성장하죠. 달라지죠. 예전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죠.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거예요.

p.101

••• 우리는 필시 새로운 인간, 공동체적 인간으로 자라게 될 거예요. ••• 그건 개체 인간보다는 분명히 크지만 그렇다고 둘보다 작은 것은 아니에요. 수많은 개체 생명들이 획일의 영이 아니라 화합의 영으로서로의 존재에 스며드는 또 다른 하나가 되는 신비이죠. 기독교적 언어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거예요. ••• 너를 마주하고 너의 의미와 존재가 나에게로 스며드는, 이것이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발생하는 관계적 힘이 모든 지배 구조를 그치게 할 것이라고 믿어요. 여성/남성만이아니라 갑과 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지배-종속관계가 아직이 땅에 있는데, 이걸 허무는 힘이 ‘기공성‘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적 존재로서의 능력에 있다고 믿어요.

p.102

굴종의 여성상 - 전투적 여성상 - 제 3의 여성(후기 근대 탈성적 전문가 개인)

p.105

어떤 면에서 페미니스트이면서도 앞으로 후기-근대 문명을 보며 남성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은 이 지점일 거예요. 낱낱의 개인들, 그러나 경쟁력이 없는 개인들이 버려지는 시스템 안에서 이제 페미니즘의 싸움은 남녀의 문제‘만’이 아닌 거죠. 생존력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후기-근대 사회의 페미니즘이 갖는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p.109

우리의 도착지는, 성차별을 포함하여 모든 지배 종속 관계가 그치는, 그리고 개개 생명들이 자신의 개별성을 행복하게 유지하면서도 전체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공동체를 풍성한 나라로 확장해 가는 그런 지점이 아닐까요? 저에게는 바로 이 ‘보편‘이요 ‘전체‘, 기독교적 언어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해 가는 시각과 운동이 페미니즘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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