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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ㅣ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1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저자 어슐러 K. 르귄의 꿈은 작가가 아니었다.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터뷰를 보면, 저자 어슐러 K. 르귄의 꿈은 작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천성인 듯, 열 살 때부터 시작된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20대에 쓴 단편소설과 장르 문학을 투고할 당시, 대부분의 문학 잡지에선 고료를 줄 형편이 되지 않았는데, <어메이징 스토리즈> 같은 상업 잡지는 원고료를 줬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한 상태였지만 돈도 없었고, 결국 SF 단편들을 잡지에 싣게 되면서 SF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녀처럼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습작 경험을 쌓으면 노년기에도 일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47년... 이란 그녀의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굳지 않은 상상력으로 <기프트>를 만들었으니 감동이 더 했다.
서부 해안 연대기 1편 - 기프트.
'서부 해안 연대기'는 총 3 편에 걸쳐 진행된다. 소제목은 없고, 숫자로 에피소드가 구분되는데, 책 마다 주제가 명확하다. 1편인 기프트는 '잘못된 재능'에 관한 이야기가 주다. 2편 '보이스'는 화자가 여자이며 시리즈 중 가장 재밌다는 평이 이어진다, 3편 '파워'는 연대기를 정리하는 내용이 아닐까 짐작한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3편엔 1편에 등장하는 그라이와 오렉이 조금씩 성장한 여행담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1편 <기프트>는 이 새로운 세계관에 발을 들어놓게 될 독자에게 안내서와 같다. 능력을 가진 종족과 그로 인해 생기는 분쟁 등. 배경에 대한 설명과 잘못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이 진정한 자신의 능력을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다. 초반엔 선조들의 이야기가 등장해서 조금 지루한 감이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에게 연민의 감정이 깃든다. 그러니 인내심을 갖고 보면 좋은 책이 되어 줄 것이다.
<기프트>에서 선물은 곧 능력을 말한다. 서부 해안의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갖고 탄생한다. 주로 능력은 보호와 전투를 목적으로 사용하며 제각각 쓰임이 다르다. 동물을 부르는 종족, 파괴본능으로 되돌리는(죽음) 종족, 무형의 칼날을 휘두르는 종족, 귀와 눈과 입을 멀게 하는 종족 등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아무런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은 무시 당하고 농노가 되기 일쑤였는데, 그렇기에 현실에서 본과 집안을 따지 듯, 부족의 혼인은 능력의 대를 끊기지 않아야 하고, 어떤 능력을 쓰는지 그 혈통을 중시한다. 현실에서처럼 정략결혼. 즉, 각 부족장들의 혈육끼리 결혼을 시켜서 부족을 보호하고, 약탈 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견제한다. 그러니 어른들은 자식들이 더 많이 살육하고 강한 힘을 가지기를 원한다.
멋진 활약은 없지만, 판타지 문학의 성장통을 다룬 이야기.
이런 세계에서 주인공 오렉은 늘 안대를 한다. 자신이 갖은 되돌림의 능력을 쓰지 않기 위해. 그 능력은 눈짓 하나로도 살인 명령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재 자체가 살상무기인 셈이다.
자신이 공포의 존재가 되자, 그는 아버지 카녹의 뒤를 이어 카스프로 일족을 이끌어야 할 운명을 지녔지만,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처음엔, 평범한 인간인 어머니와 엄청난 능력으로 신임을 얻고 있는 족장 아버지 카녹 사이에 태어나 10살이 넘도록 '선물'을 받지 못한 오렉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위기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되돌려진 뱀을 발견한다.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은 오렉이 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자신은 그럴 마음이 없었고, 모든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후에도 비슷한, 아니 더 엄청난 일이 계속 벌어지자, 오렉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까봐 눈을 봉인하길 부탁한다. 장님으로 살겠다. 자신을 낳은 부모 조차 되돌릴까봐 어렵게 내린 결정. 스스로 능력을 길들일 수 있을 때까지 눈과 손과 언어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선물'을 봉인한 것이다.
신체가 멀쩡한 잘생긴 청년이 안대를 쓴 채 장님으로 산다니. 파괴하려고 할 때면 안 되고, 파괴하고 싶은 의지가 없을 때 파괴되버린다니.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염려하는 마음이야 이해는 되지만,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무모함이었다. 종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어머니 멜의 죽음에도 안대를 놓지 못하고. 아버지 카녹에 대한 증오는 커져만 간다. 눈 앞의 모든 것을 파괴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청년을 무력하게 만든다. 힘든 시련을 겪으며 괴로워 하지만 혼인을 약속한 오랜 친구, 그라이 덕분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기프트>에서 오렉을 붙들고 늘어진 문제는, 처참하게 벌어진 되돌림을 쓴 사람은 오렉인가, 다른 이인가. 하는 문제다. 또,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줄줄이 이어진다. 선물을 살인에만 쓰여도 좋은가? 혹시 원래는 사람을 돕기 위한 능력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능력을 부족의 욕망을 위해 사냥이나 전쟁으로 쓰이는 것을 원치 않는 아이들은 갈등한다. 이들은 자신의 참 된 재능으로 자립하길 원하는데... 과연 2편에 등장하는 소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3편에서 성장한 이들의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