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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조 누르하치 비사
후장칭 지음, 이정문 옮김 / 글로연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누르하치? 칸 왕이라고? 징기스칸은 들어봤지만 처음 듣는데, 언제적 인물이야?"
누르하치를 아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하긴, 징기스칸이 더 유명하니까. 나 역시 그가 어느 시대에 살았고,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알지 못해 물어봤던 것이다. 누르하치보다는 후금을 먼저 알았으니까. 그가 후금을 세웠다니 놀라웠다. 드라마에 잠깐씩 언급되었던 후금. 자세히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식 이름은 쿤둘런 칸. 책에서는 그렇게 부르진 않았기에 더 생소한 이름이다. 대체로 멋진 인물로 그려진다. 흩어진 여진족들을 하나로 합치기로 정한 후, 계획대로 실행했다. 영웅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비화가 생겨나기 마련! 통일이 있기까지 그 밑에 많은 추종자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의 밑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준 장일화와 혁혁한 공을 세우는 다섯 대신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이 수없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위험을 이겨내고 더 큰 앞날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왕은 부인이 많고 따라서 왕권을 놓고 다투는 왕자들이 자연히 태어난다. 그의 아들 저영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는 광경이 상상됐다. 여진족은 남편이 죽으면 남겨진 아내를 동생이 거두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과이가가 과부가 되자, 망고이태에게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저영은 입을 막기 위해 감옥을 지키던 병사의 혀를 거둬갔고, 칼을 들고 쫓아온 망고이태에게는 채찍질로 죽이려 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신임하는 의정대신들이 저영을 말리려고 찾아왔지만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해임하겠다며 협박한다. 아무리 큰 아들이라 해도 저영의 잘못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누르하치는 끝내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처형하게 된다.
동생의 여자를 빼앗고, 태자 자리가 위태롭게 되자, 모반을 계획했던 저영은 허망하게 생을 마친다. 그 모반이라는 것이 인형에 주술을 거는 미신이었지만. 설령, 사람을 해하는 힘이 없더라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면 섬뜩할 만하다.
대업을 이루고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였지만, 그의 마지막은 씁쓸했다. 원숭환이 보낸 능욕적인 그림 선물은 상처 입은 누르하치의 죽음을 재촉하는 촉매제와 같았다. 아마 혈압이 엄청나게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
여진족은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남성 우월주의라 마음에 안 드는 풍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문화였다. 네 번째 정실부인 아파해와 몇몇 여인들은 누르하치와 함께 순장을... 왕권을 둘러싼 암투가 마지막까지 가시질 않는 걸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파란만장하던 과거, 그는 적장을 달아나게 만드는 용맹스런 범과 같았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일엔 손이 미치지 않아 저영을 처형해야 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지만, 대체로 의를 저버리지 않는 삶을 산 것 같다. 삼국지처럼 용맹한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와 무리들은 지혜를 잘 이용해서 온갖 술수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갈 길을 잘 가주었다. 처음 시작은 억울한 죽음, 그리고 복수였다. 니감왜란과 이성량,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복수를 염원했던 스물다섯의 누르하치. 부친과 조부가 억울하게 죽자 아버지가 남긴 열세 벌의 갑옷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낸다. 화살이 빗발치고, 배신과 살육이 난무하는 그 시대에, 장일화와 같은 스승을 만나고, 동춘수와 같은 부인을 얻는 다면 세상을 다 얻은거와 다름없지 않을까? 마음만큼은 의지할 곳과 안식처가 충분했을 것 같다. 의리와 사랑으로 목숨을 내던지는 부인과 지인이 곁에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 재산이요, 행복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보면 그만큼 행복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