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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언덕의 집
타카도노 호코 지음, 치바 치카코 그림, 서혜영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자신의 동갑내기 사촌으로부터 이번 여름방학을 함께 보내자는 편지 한통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혼자 떠나는 첫 여행이 가슴이 벅차 오를 정도로 기대에 부풀었던 후코. 기차에 내려 엄마가 적어 준 메모를 손에 꼭 쥐고 할아버지집을 찾아가기 위해 낡은 전차를 타고 전차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미기와다테는 후코의 엄마가 태어난 곳이죠.
후코는 버스에서 내려서 바다부터 곧장 이어지는 비탈길을 쉬지 않고 올라 벽돌로 만든 시계탑을 별 생각 없이 올려다 봤어요. 사람들이 시계 언덕이라 부르는 시계탑은 예전에 기독교계 사립 학교 건물의 일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역사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쓰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벽돌에 박혀 있는 하얀 문자판 위에는 두 개의 시곗바늘이 돌연 도마뱀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얼굴에 두 개의 빨간 날개를 달고, 어른 같은 표정을 한 아이 천사가 천천히 나타나 후코와 시선이 마주쳤어요.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후코는 긴장하며 숨을 삼켰지요.
그곳에서의 앙상하고 훤칠한 몸매에 커다란 갈색 눈이 빛나는 사촌 마리카와의 첫만남이 영 어색하기만 두 소녀는 사촌끼리 왕래가 자주 없던 탓에 왠지 함께 있으면 불편한 시간이었으나 흘러가 버리는 것은 아쉬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혼자가 되자마자 후코는 활짝 열린 창으로 다가가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함께 오늘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랐어요. 조금 전에는 강한 석양 탓에 미처 못 본 이상한 계단이 마음에 걸렸어요. 바로 후코의 할머니가 빨래를 널다가 떨어져 사고를 당한 곳이라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건 할아버지께 죄송할 따름이었죠.
하지만 후코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쿵쾅거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곳에 감도는 달콤한 향기에 끌려 엉겁결에 창문 아래쪽 벽에 대고 손에 힘을 주게 돼요. 곧 계단이 길게 뻗어나가 오솔길을 만들고는 그리운 장소를 방문하는 것 같은 기쁨과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애절한 느낌이 마구 솟아 올랐어요.

뭐라 표현할 길 없는 장밋빛 안개 속에 초록색 경치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초록 울타리로 둘러싸인 오솔길을 걸어 나가면서 몸을 감싸오는 황홀한 느낌에 푹 빠져들고요. 아주 어린 시절에 놀았던 어느 봄날의 정원을 거니는 거 같은 기분으로 스카프에 그려진 지도의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흔들리는 안개 사이로 끊임없이 내리쬐는 금색빛의 호화로운 방으로 금색 손잡이가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죠.
선반에는 소라껍질들, 플라스크, 그림 양초, 엄청난 양의 조각이 놓여 있는 장식장과 장롱들,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 많은 벽시계와 탁상시계들, 여기저기 화분에서 푸르게 우거져 있는 각양각색의 식물들과 춤추며 날아다니는 선명한 색깔의 나비들까지 온갖 물건들로 만들어진 기묘한 미로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와요.
조각이 새겨진 난간에 손을 얹고 계단을 올라가는 후코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각양각색의 장난감 박물관? 모두 손바닥에 올려 놓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집들, 손톱크기의 테이블 세트, 나무 인형들이 하나 가득 놓여있었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알게 되는 비밀정원의 주인은..

그토록 뛰는 가슴으로 빠져들었던 아름답고 매혹적인 정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며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자신이 얼마나 그 정원에 이끌렸는지 절실히 느꼈던 후코지만 할머니와 자신이 들어간 정원에 사촌 마리카가 결코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없었죠.
겉으로 보이기엔 굳게 닫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회중시계가 째깍 째깍 서서히 꽃으로, 시곗바늘이 빨강과 초록색 암술과 수술로 변하고 검게 녹슨 사슬에서 짙은 초록 잎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진 눈부신 일곱 색깔 무지갯빛 매혹적인 정원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란 걸 끝까지 모른 체 말이죠.
문득 빛에 바래서 갈색이 된 천 블라인드를 내리는 순간, 더 이상 차창 밖 풍경은 보이지 않는 의외의 상황에 후코는 아이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비로소 지금까지 평범한 자신에게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을 뒤돌아보게 돼죠. 다시는 가 볼 수 없는 비밀정원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서 집으로 향하죠.
가끔은 책으로 설명되는 그 너머의 세상이 배낭을 메고 떠나는 어떤 여행지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절대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오직 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돌려서 열리는 눈부신 정원의 실체, 그 짜릿함과 눈을 뗄 수 없는 신비함에 이 무더운 한 여름밤도 달콤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