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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3년 - 레벨 1 ㅣ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조성자 지음, 이영림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10년 8월
평점 :
달콤했던 추석연휴가 끝나갈 무렵, 초등 3학년 큰 딸과 둘만의 서점나들이를 했어요.
딸 아이의 학교 준비물로 국어사전을 사러 간 것인데, 화장실에서 3년? 재미있는 책 한권을 덩달아 손에 쥐었죠.
온통 초록색 풀잎으로 둘러쌓인 평범한 화장실 같은데 어떻게 그 좁은 공간에서 3년을 보낸다는 건지 책표지만 봐서는 그 궁금증이 쉽게 풀리지 않네요.
그 덕분에 추석연휴 내내 음식장만하고 반가운 친지들과 웃음꽃 피우는 사이, 책 한권 읽을 새 없던 딸 아이가 오랜만에 책읽기에 흠뻑 빠져 들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저랑 똑같은 초등 3학년의 여자아이가 3학년 들어 처음 현장학습 떠나는 날, 엉뚱하게도 휴게소와 떨어진 외딴 화장실에 홀로 갇히는 일을 겪자 아이도 몰입해서 책을 읽는 듯.
책을 다 읽고 나서 아이가 한마디 내뱉던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네요. "아이, 진짜 3년을 화장실에 갇힌 줄 알고 걱정했네!"
한 눈에도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은 화장실에 거미줄이 얼키설키 쳐져 있고 화장실 바닥에 버려진 화장지도 누렇게 바래 있는 곳에 갇혔으니
이만저만 하면 왔던 길을 되돌아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휴게소로 갔을 법 한데 아이는 본의 아니게 한 순간에 현실과 단절된 공간에 갇히고 마네요.
아무리 화장실 문을 밀어보고 손잡이를 힘껏 돌려봐도 화장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고, 문을 쾅쾅 두들겨 보고 큰 소리를 내고 "누구 없어요?" "엄마!" 마음속으로 '아빠'를 외쳐봐도 당장, 자신을 걱정하며 달려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점점 숨은 턱밑까지 차고 눈앞은 캄캄해지면서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쿵!" 소리를 내며 자꾸 떨어지는 거 같은데 지금 이 안타까운 순간에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마냥 슬퍼서 눈물이 하염없이 나죠.
이대로 화장실에 갇혀 죽은 미이라가 되는 상상도 들 거예요.
핸드폰대신 차고 온 시계를 보면서 혼자 화장실에 갇혀 있던 약 20분이 두 시간은 넘은 것 처럼 길게 느껴지고, 오직 믿을 사람은 자신뿐 이라는 걸 온 몸으로 느끼겠죠.
어떡하든 이 냄새나고 더러운 화장실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 생각뿐 일 거예요.
그렇지만 변기 위 작은 창문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보기 위해 물받이 통 위로 올라서는 순간, 작은 창문너머는 온통 숲이며 이곳이 버려진 화장실이란 걸 눈으로 확인하니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네요.
어쩌면 인원점검을 하던 선생님이 없어진 자신울 찾아 나섰을 거란 기대, 희망을 가져보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화장실 안을 정신없이...
변기 위 물받이 통 위를 올라섰다 내려왔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소리를 질러봤다 안절부절 못하네요.
자꾸 머리카락이 쭈뼛쭈뻣 서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니 아예 힘없이 화장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화장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해요.
제작년에 엄마와 싸우며 집을 나간 아빠, 엄마 생각에, 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도 하면서 울컥울컥 밀려오는 서러움과 두려움을 달래기도 하죠.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만큼이나 안타까운 주변인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해요. 진심으로 화장실에서 나가면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다짐하죠.
그리고 스스로 기운을 차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참 대견하기도 하네요.
만약 나 자신도 그런 좁은 공간에 갇혔다면 어떤 생각과 다짐으로 밀려오는 불안감과 공포를 이겨낼까?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네요.
더욱이 이런 끔찍한 경험이 글쓴이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하니 글쓴이의 경험담도 <화장실에서 3년>주인공이야기 못지 않게 재미나게 읽었어요.
몇 년전, 그리스의 크레타 섬을 방문한 작가는 겨울이라 박물관 안은 아주 휑 할 정도로 관람객이 없는데다 짧은 겨울 해 때문에 박물관이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고 해요.
그리고 곧, 문을 닫는다는 박물관 직원의 말에 서둘러 작품을 둘러보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벌써 직원들이 하나 둘 박물관을 나서던 그 때,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화장실에 그만 갇히고 말았다죠.
아무리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어봐도 문이 열리지 않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다급한 마음에 물받이 통 위를 밟고 올라가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화장실 뒤도 닫힌 공간이라 숨이 턱 막혔고 눈앞이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대요.
다행히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을 땐 문이 철컥하고 열렸다니 동화 속에선 무려 4시간을 그 좁은 화장실에서 갇힌 주인공에 비하면 대단히 짧은 시간이죠.
그럼에도 작가역시 동화속 주인공만큼이나 소름끼치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경험했대요.

하지만 작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사춘기 시절의 다락방 얘기와 어릴 적 읽은 <안네의 일기>주인공 얘기를 꺼내 놓으면서
공간의 굴레를 벗어 무한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창조의 공간으로 갇힌 공간의 놀라운 위력을 살짝 내비춰요. 나만의 다락방, 내가 꿈꾸던 나만의 공간, '내 방' '내 아지트'를 꿈꾸던 어린 시절로 추억여행을 막 다녀오는 듯 해요.
비록 화장실과 같은 의외의 공간에 갇혀 본 경험이 없다 할지라도 형제가 여러 명이던 어린 시절엔 다락방같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 몰래 간직해 오던 좋은 추억 하나씩을 꺼내보게 하죠.
'세상 살다보니 스스로 선택한 공간이 아닌, 본의 아니게 갇힌 공간에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훗날의 삶이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는 여운과 함께 말이죠.
이왕이면 딸 아이도 같은 생각을 하며 갇힌 공간의 두려움대신 자신만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그 작은 공간을 넘어 우주로 쭉쭉 뻗어나갈 수 있는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