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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오세영 교수 문학강해 3
오세영 엮음 / 타임기획 / 2000년 3월
평점 :
중학교 이상을 다닌 사람이라면 이광수의 '무정'이 한국의 근대적인 장편소설로서는 최초로 발간된 사실을 알고 있을것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이 책을 이제사 나도 완독했다. 국문학을 전공한답시고 이제야 이 책을 읽었다는게 사실은 좀 부끄럽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왜 여태 읽지 않았던가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중국에는 노신이 있고 일본에는 나쓰메 소세키가 있다. 그리고 한국에는 이광수가 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광수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 자아의 성숙에 대한 문학적 발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무정'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뚜렷한 성격을 갖고 있다. 형식, 영채, 선형의 삼각형 사랑은 고전소설의 도식을 벗어나 있다. 동욱이라는 진취적이고 선구적인 여성상도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의 성격창조다.
인물이나 문체 그리고 그 계몽적인 성격(조혼반대, 자유연애사상, 준비론적인 애국자강의식)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해설적인 결말의 구조는 구태인지 기법인지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늙어 죽게 될 때에는 기어이 이보다 훨씬 좋은 조선을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게으르고 힘없던 우리 조상을 원통히 여기는 것을 생각하여 우리는 우리 자손에게 고마운 조상이라는 말을 듣게 합시다'(381쪽)
이 구절은 이광수의 사상, 불문학자 김붕구가 지적했던 '새세대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물려받은 전통은 '게으르고 힘없던'이라는 수식어에서 확인되듯 보잘것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대 우리 젊은이들은 전통이 부정된 자리에서 새롭게 근대의 과업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삼랑진의 폭우 속에서 민중의 참상을 보고 깨닫게 된 네 젊은이(형식, 동욱, 영채, 선형)의 의식이다. 이때 근대의 성취란 이러한 것이다.
'교육으로 보든지 경제로 보든지, 문학 언론으로 보든지, 모든 문명 사상의 보급으로 보든지 다 장족의 진보를 하였으며 더욱 하례(賀禮)할 것은 상공업의 발달이니, 경성을 머리로 하여 각 대도회에 석탄 연기와 쇠망치 소리가 아니 나는데가 없으며 연레에 극도에 쇠하였던 우리의 상업도 점차 진흥하게 됨이다.'(388쪽)
이광수의 이같은 계몽적 언사는 '조물의 생각을 도둑질하여 만들어 놓은 문학이라든지 예술이라든지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퍽 많이 배'(360쪽)울 수 있다는 그의 문학관 혹은 예술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옛날 영화를 보면, 지금의 모습에 비추어 볼때 낯설은 풍경들이 많이 있다. 그 낯설음은 묘한 쾌감을 주는데,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골동취미가 아닐까? '무정'의 경우도 그러하다. 낯설면서도 친숙한 과거의 풍경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더 크게 했던것 같다.
아직도 읽지 못한 근대문학 작품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 부끄러움이 곧 즐거움으로 뒤바뀔 시간을 기다려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