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때 지하철 역마다 강아지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대역에도 매일같이 한 아주머니가 3번 출구 계단의 중간 부분에 앉아 있곤 했다. 앞에는 뚜껑이 없는 과일상자 크기의 작은 박스가 놓여 있고 안에는 태어난지 한달이 될까 싶은 어린 강아지들 7-8마리가 서로 붙어서 꼬물거렸다. 말티즈, 요크셔 테리어, 슈나우저, 골든 리트리버. 한동안 후문에서 바로 타기만 하면 되는 버스 대신 일부러 멀리 돌아 지하철역까지 걸어다녔다. 강아지들을 보기 위해. 아주머니가 ‘싸게’ 준다며, 만져보라고 권하면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러던 어느날인가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강아지들을 만지고 말았다. 말티즈 한마리가 내 손가락을 물었다. 간지러웠다. 그런데 손가락이 물린 순간 전기라도 흐른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품안에 강아지가 있었다. 7만원이었다. 부모님께는 친구네 집에서 쫓겨난 강아지를 데려간다고 말했다. 아빠는 좋아했고, 엄마는 화를 냈다. 그때는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어서 몰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강아지는 엄청나게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 상태였다. 잘 씻기고 먹이고 정성스럽게 돌봤다. 처음에는 화를 내던 엄마도 어느새 정을 붙여 귀여워했다. 한달 정도 잘 놀던 강아지는 어느날인가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개에게 치명적인 파보와 코로나 장염이었다. 병원에서는 둘 중 하나씩만 걸려도 치사율이 70, 80%인데 둘 다 걸렸으니 95% 확률로 죽을 것이라며 안락사를 시키라고 했다. 됐다고, 안된다고 강아지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 울고난 다음날 지하철에 가서 아주머니에게 따졌다. 건강하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병든 강아지를 팔면 어떡하냐고. 다 죽게 생겼다고. 아주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그럼 대신 다른 강아지를 하나 골라서 데려가라고 했다. 교환해준다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미안해보이는 얼굴도 없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돌아섰다.

집에 돌아온 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강아지를 다시 동물병원에 데려가 소용없다는 수의사에게 난리를 쳐서 링거를 맞추고, 온가족이 일주일 넘게 달라붙은 끝에 어찌어찌 살려냈다. 그 강아지가 올해로 15살이 되었다. 이후로도 가끔씩 박스에 담겨있는 강아지들을 보면, 그때의 강아지들이 생각나곤 했다. 장염은 전염성이 강해서 아마 그 박스 안에 담겨있던 녀석들이 전부 감염이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죽었겠지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어디서 어떻게 죽었을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괴로워졌다. 강아지는 간신히 살려냈지만 그 때의 기억이 너무 괴로워서, 지금은 햄스터 한마리조차 기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생명을 기르는 것은 너무나도 무거운 일이다.

하재영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번식장, 개농장, 유기견 보호소, 도축장, 보신탕 업소 등을 다니며 한국 개 산업의 실태를 다룬 르포이다. 소설가인 하재영 작가는 어느날 우연치않게 지인으로부터 처치곤란 신세가 된 피피를 떠맡게 되고, 동물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동물복지 단체에서 활동을 하다 본격적인 르포를 쓰게 된다. 책에는 번식업자, 개농장주, 유기견 보호소장, 개 미용업자, 도축업자 등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간혹 동물농장 등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처참한 상태로 살아가는 개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태는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눈물이 나와 읽기가 어려웠다. 번식장의 개들은 평생을 강간(개들도 강간을 당하면 충격을 받는다. 암컷 뿐 아니라 수컷인 종견들도 강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관계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수컷을 인간들이 억지로 발기시킨 후 암컷의 생식기에 강제로 집어넣고 빼지 못하게 붙드는 방식으로 교배가 이루어진다고)을 통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그렇게 낳은 새끼를 바로 빼앗기는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체념하거나 미쳐버린다.

식용을 목적으로 길러지는 개농장의 개들이나 관리가 안되는 유기견 보호소의 평생을 제대로 된 물을 마셔보지 못하고, 학교 급식소 등의 음식물 쓰레기 등을 먹으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음식물 수거 업체로 인증을 받기 위해 유기견을 데려다놓고 그대로 방치하여 좁은 우리에서 몇십마리의 개들이 굶어 죽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한국은 동물관련법안이 매우 약한 국가여서 옥상에서 강아지를 떨어트려 죽이거나 남의 개를 훔쳐다 불에 구워 먹어도 벌금 몇십만원으로 끝난다. 그나마 ‘재물 손괴죄’를 적용할 경우에 이렇다.

책에서는 이와같은 개의 복지 관련한 문제의 근본원인이 개식용에 있다고 지적한다. 흔히 애완(반려)견과 식용견은 따로 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 개는 가축이지만 축산물 관리 위생법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식품으로서 관리가 되지 않는 무법지대에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유기견을 비롯하여 타인의 반려견을 그냥 데려다가 잡아먹는 경우도 생기며 온갖 개들이 쓸모(애완, 번식, 기타 등등)가 없어지면 최종 결말이 고기로 전락한다. 살이 없는 소형견은 개소주를 만들 때 이용된다. 그럼에도 개는 식품이 아니기에 규제에서 벗어난다. 가축으로서 관리되지도 않고 음식물 쓰레기를 먹거나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된다.

그렇다면 ‘합법’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합법화에도 비용이 들기에 점점 줄어드는 제한적인 개식용 인구를 위하여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식용견’은 결코 식용이라 상관없다고 따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개를 둘러싼 모든 문제는 서로 얽혀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보신탕 논란이 있을 때마다, 보신탕을 먹지 않지만 보신탕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나 역시 개를 제외한 다른 동물들을 먹고 있고, 앞으로도 안 먹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늘 조심스럽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이미 동물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상황에서 무언가를 취사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소고기는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을 수도 있고, 생선은 먹지만 랍스터는 먹지 않을 수도 있다.(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에세이 <랍스터는 생각해봐>에는 랍스터를 산채로 물에 끓이는 요리 방법을 예로 들면서 실은 랍스터가 보기와 다르게 엄청나게 통증에 예민한 생물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앞에서 그럼 소는? 돼지는? 닭은? 오리는? 생선은? 이라고 조롱하듯이 반박하지만, 이와 같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어도 계급문제에는 무심하거나, 노동문제에는 관심이 있어도 여성문제에는 편협한 사람들이 적지 않듯이, 빈민계층을 위해 애쓰면서도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듯이 모든 사람이 모든 부분에 대해 무결할 수 없다. 동물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종”이나 “생명” 별로 차등을 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다. 책에서는 말한다.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잖아요.”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 괴로웠다. 채식 문제는 상당히 예민한 주제이다. 채식 뿐만이 아니라 먹는 문제가 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과 서평은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고 또 불쾌할 수 있다. 채식과 관련한 첨예한 논란들이 떠오르니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불편함과 괴로움만이라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사 평생동안 고기를 먹더라도, 맛있게 먹더라도, 그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알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은 육식을 비난하거나 금지를 촉구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다. 계몽적이지도 않다. 다만 우리에게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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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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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류를 하게 된다. 좋은 책, 좋지 않은(나쁘다고 하는 것은 좀 그렇고) 책. 재미(흥미)있는 책, 지루한 책. 물론 매번 저렇게 똑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은 저 중간 어드매에 있을 때가 많다. 당연하지만 좋은 책이 늘 재미있지만은 않다. 좋지 않은 책이 재미있는 경우 또한 매우 많고.

올 봄에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대를 했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쓴 페미니즘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이라기에. 그런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 예상과는 영 달랐다.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읽히지가 않았다. 몇날 며칠을 노력했으나 결국 절반쯤 읽다가 포기했다. 그렇게 영영 잊혀질 뻔 하였으나....소설가들이 꼽은 올해의 베스트 소설 리스트에 들어간데다가(외국소설로는 유일하게!) 절반쯤 읽었던 게 아까워서 결국은 다시 한 번 도전하게 되었다. <19호실로 가다>와 그것과 세트격인 그녀의 또 다른 단편선 <사랑하는 습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도 단순하고 단어도 어렵지 않은데 희한하게도 머리에 안 들어온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곰곰이 뜯어보니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 조금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함께 몰고 온 유쾌한 분위기가 찰리에게는 개인적인 원수 같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 뒤쪽 어딘가에서 항상 잠복하고 있는 유령 같았다.” 와 같이 단어를 조합하고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진다. 이게 작가의 특징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현재로서는 판단이 어렵다.

게다가 많은 작가들이 인물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상황과 메세지를 드러내는데 반하여 레싱은 인물의 심리와 사고를 대부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묘사의 수준이 엄청나게 디테일하여 어떤 의사결정에 앞서 머리속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찰나의 망설임과 계산과 판단 등이 모두 서술된다. 밖에서 보면 단순해 보이는 행동에 3-4줄 가량이 할애된다. 아주 사소한 동작마저 유의미하게 평가된다. 인물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조차 그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다. 이러하다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피로를 느끼게 된다.

물론 좋은 소설이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렴 노벨상 수상 작가 아닌가. 1930-50년대 전후의 시대상과 가부장제 속의 모순된 인물들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특히 <19호실로 가다>의 가장 앞에 실린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는 소위 말하는 데이트 강간 이란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왜 여성들이 저항을 하지 않고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지를 굉장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 단편이었다. 그 외 다른 단편들에스도 인간의 모순되고 혼란스럽기 마련인, 말하자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과 같은 심리상태가 빼어나게 묘사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도리스 레싱은 영국작가인데 그녀의 책을 읽고서 영국 사람들하고는 가깝게 지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교토(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것으로 유명함) 사람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그녀의 글을 통하니 예의 바르고 체면을 차리는, 달리 말하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영국인의 면모가 참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방>이라는 단편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 아파트에는 두 여자가 살았다. 돈이 거의 없었는지, 카펫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벽을 장식한 것은 여행 포스터뿐이었다. 위층 여자 말로는, 두 여자가 밤새 파티를 열 때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파티의 소음이 좋았어요. 살아 있는 소리가 좋아요.” 비난하는 말투였다.” 비난하는 말투로 저런 말을 하다니...ㄷㄷㄷ

물론 도리스 레싱 자체가 유달리 통찰력이 발달하고 시니컬한 사람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여간에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뭐 하나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없다. 또한 흔히 소설에서 느껴지기 마련인 인물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도 굉장히 특이했다. 개별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 개인의 감정(냉소 이외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마치 개미나 햄스터 관찰일지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호실로 가다>보다는 <사랑하는 습관> 쪽이 이야기의 재미 면에서는 조금 더 낫다. (사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사실 책을 왜 두 권으로 나누어서 냈는지 모르겠다. 서문에 레싱이 직접 자신의 단편들에 짧게 코멘트한 글이 실려있는데 거기 등장하는 단편들이 <19호실로 가다>와 <사랑하는 습관>에 뒤섞여 있다. 따라서 두 권을 모두 읽지 않으면 서문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차라리 한 권으로 만들거나 공통된 제목을 붙여 1,2권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이렇게 하는게 더 잘 팔릴 것 같으니까 그랬겠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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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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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류를 하게 된다. 좋은 책, 좋지 않은(나쁘다고 하는 것은 좀 그렇고) 책. 재미(흥미)있는 책, 지루한 책. 물론 매번 저렇게 똑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은 저 중간 어드매에 있을 때가 많다. 당연하지만 좋은 책이 늘 재미있지만은 않다. 좋지 않은 책이 재미있는 경우 또한 매우 많고.

올 봄에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대를 했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쓴 페미니즘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이라기에. 그런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 예상과는 영 달랐다.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읽히지가 않았다. 몇날 며칠을 노력했으나 결국 절반쯤 읽다가 포기했다. 그렇게 영영 잊혀질 뻔 하였으나....소설가들이 꼽은 올해의 베스트 소설 리스트에 들어간데다가(외국소설로는 유일하게!) 절반쯤 읽었던 게 아까워서 결국은 다시 한 번 도전하게 되었다. <19호실로 가다>와 그것과 세트격인 그녀의 또 다른 단편선 <사랑하는 습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도 단순하고 단어도 어렵지 않은데 희한하게도 머리에 안 들어온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곰곰이 뜯어보니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 조금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함께 몰고 온 유쾌한 분위기가 찰리에게는 개인적인 원수 같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 뒤쪽 어딘가에서 항상 잠복하고 있는 유령 같았다.” 와 같이 단어를 조합하고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진다. 이게 작가의 특징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현재로서는 판단이 어렵다.

게다가 많은 작가들이 인물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상황과 메세지를 드러내는데 반하여 레싱은 인물의 심리와 사고를 대부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묘사의 수준이 엄청나게 디테일하여 어떤 의사결정에 앞서 머리속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찰나의 망설임과 계산과 판단 등이 모두 서술된다. 밖에서 보면 단순해 보이는 행동에 3-4줄 가량이 할애된다. 아주 사소한 동작마저 유의미하게 평가된다. 인물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조차 그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다. 이러하다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피로를 느끼게 된다.

물론 좋은 소설이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렴 노벨상 수상 작가 아닌가. 1930-50년대 전후의 시대상과 가부장제 속의 모순된 인물들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특히 <19호실로 가다>의 가장 앞에 실린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는 소위 말하는 데이트 강간 이란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왜 여성들이 저항을 하지 않고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지를 굉장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 단편이었다. 그 외 다른 단편들에스도 인간의 모순되고 혼란스럽기 마련인, 말하자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과 같은 심리상태가 빼어나게 묘사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도리스 레싱은 영국작가인데 그녀의 책을 읽고서 영국 사람들하고는 가깝게 지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교토(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것으로 유명함) 사람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그녀의 글을 통하니 예의 바르고 체면을 차리는, 달리 말하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영국인의 면모가 참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방>이라는 단편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 아파트에는 두 여자가 살았다. 돈이 거의 없었는지, 카펫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벽을 장식한 것은 여행 포스터뿐이었다. 위층 여자 말로는, 두 여자가 밤새 파티를 열 때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파티의 소음이 좋았어요. 살아 있는 소리가 좋아요.” 비난하는 말투였다.” 비난하는 말투로 저런 말을 하다니...ㄷㄷㄷ

물론 도리스 레싱 자체가 유달리 통찰력이 발달하고 시니컬한 사람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여간에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뭐 하나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없다. 또한 흔히 소설에서 느껴지기 마련인 인물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도 굉장히 특이했다. 개별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 개인의 감정(냉소 이외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마치 개미나 햄스터 관찰일지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호실로 가다>보다는 <사랑하는 습관> 쪽이 이야기의 재미 면에서는 조금 더 낫다. (사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사실 책을 왜 두 권으로 나누어서 냈는지 모르겠다. 서문에 레싱이 직접 자신의 단편들에 짧게 코멘트한 글이 실려있는데 거기 등장하는 단편들이 <19호실로 가다>와 <사랑하는 습관>에 뒤섞여 있다. 따라서 두 권을 모두 읽지 않으면 서문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차라리 한 권으로 만들거나 공통된 제목을 붙여 1,2권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이렇게 하는게 더 잘 팔릴 것 같으니까 그랬겠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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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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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은 순문학에 비해 폄하되는 경우가 많고 그 중에서도 호러소설은 아마도 최하위의 영역일테지만, 어쨌든 나는 호러소설을 좋아하고 꽤 자주 읽는다. 텍스트만으로 ‘진짜로’ 무섭게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미쓰다 신조의 소설들은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일본 호러소설 대상을 수상하고 “어마어마하게 무섭다!!”며 호들갑을 떨어대던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를 꽤나 기대를 하며 읽었던 것인데, 홍보문구와는 다르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차라리 어릴 때 초등학교 교실마다 한 권씩 비치되어 있었던 공포특급이 더 무서워.... 게다가 초판 한정 특별 부록이라며 희한한 부적같은 것이 들어있는데 엄청 유치하다. 그냥 읽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도 살짝 들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는 꽤 재미있다. 그렇다고 강력추천까지는 아니고, 눈에 띄면 한 번 보세요...정도?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요인이란 것이 빤해서 몇가지 패턴 안에서 반복되기 마련인데, 이 패턴을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에 맞추어 풀어내느냐가 호러 소설의 관건이다. 그런면에서 어쨌든 끝까지 읽게 만들 정도의 흡입력이 있었다. 문장도 술술 넘어가서 잘 읽히고.

흥미로운 것은 일본 공포소설을 보다보면 ‘민속학자’ ‘민속학과’ 같이 각 지방의 고유한 전설이나 민담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참으로 이해가 안간다. 왜 그런 무서운 걸 연구하는지. 공포소설을 읽으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또 하나 재미있었던 지점은 귀신들의 원한(?)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 시대가 확실히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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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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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뉴욕주의 가난한 동네에 사는 소녀들은 어느날 리더인 렉스를 주축으로 자경단을 결성한다. 이름하여 폭스파이어. 한결같이 불우하고 열악한 가정 출신인 폭스파이어 자매들은 문자 그대로 피의 결연을 맺고 - 집에서 문신을 하며 그 피를 서로 섞는다 ㄷㄷㄷ -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남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한다. 성추행 교사의 차에는 “여학생들을 따먹는 선생”이라는 문구를 적어 망신을 주어 쫓아내고, 조카를 성폭행하려는 삼촌을 다같이 달려들어 실컷 패주기도 한다. 여동생에게 강제로 성매매를 시키는 남자의 집에는 불을 지르기도 하고, 친구를 성희롱하는 남성의 목에는 칼을 가져다대며 위협하여 쫓아낸다.

초반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은 책을 읽을수록 더욱 명확해지는데...남성에 대한 분노로 모였으나 그 저항의 방법이 불법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것, 여성과 계급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인종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흑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이며 실제로 폭스파이어 가입을 희망하는 소녀들 중 흑인은 거부한다 ), 성평등 추구를 넘어 남성을 상당히 적대시하고 증오한다는 것(남성과 사귀면 처단당한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구성원 간의 관계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 등등....이...이거 완전 워마드 잖아?

19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1993년에 쓰여진(우리나라에는 2017년에 출간) 조이스 캐롤 오츠의 <폭스파이어> 속 자경단 ‘폭스파이어’는 많은 면에서 워마드를 연상시킨다. 단 실제의 워마드가 아닌 세상이 ‘생각하는’ 워마드를. 최초에는 원대한 포부와 정의감에서 시작한 일이 불법과 폭력, 사기 - 물론 소설은 인물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만 - 로 끝난다는 것도 그렇고 절반 정도의 정의감과 절반 정도의 중2병이 섞여 있는 등장인물들도 그렇고.

이야기는 젠더, 계급, 인종 문제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데, 특히나 폭스파이어가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 혹시 ‘남성’ 배후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남친이 누구인지 빨리 털어놓으라며 추궁당하는 부분은 여성 혼자서는 흉악 범죄조차 저지를 수 없다는 당시의 편견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녀들을 무조건 옹호하고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 오츠는 인물들을 애정으로 대하면서도 그들의 모순되고 사악한 면모까지 여과없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떠나 매우 매우 재미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은 답답했고, 소녀들이 복수하는 대목은 짜릿했으며, 주요인물 중 하나인 렉스가 감옥에 간 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했다. 인물들은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그 중에서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인 렉스는 몹시 매력적이었다. 시점과 장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문장은 그녀가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나와있는데 이동진 평론가와 김혜리 평론가로부터 4.5점씩을 받은 상당한 수작으로 알고 있다. 어제 궁금해서 잠시 보다가 소설만큼 재미있지 않아서 중간에 껐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가 있을 때는 무조건 영화를 먼저 보아야 할 듯. 하여간 영화도 꽤 평이 좋은 듯 하니 소설을 읽기 귀찮은 사람들은 영화를 대신 봐도 좋을 듯 하다. 매우 추천이다. 불행하지만 용감한 소녀들이 꿈꾸었던 작은 혁명이 실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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