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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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뉴욕주의 가난한 동네에 사는 소녀들은 어느날 리더인 렉스를 주축으로 자경단을 결성한다. 이름하여 폭스파이어. 한결같이 불우하고 열악한 가정 출신인 폭스파이어 자매들은 문자 그대로 피의 결연을 맺고 - 집에서 문신을 하며 그 피를 서로 섞는다 ㄷㄷㄷ -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남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한다. 성추행 교사의 차에는 “여학생들을 따먹는 선생”이라는 문구를 적어 망신을 주어 쫓아내고, 조카를 성폭행하려는 삼촌을 다같이 달려들어 실컷 패주기도 한다. 여동생에게 강제로 성매매를 시키는 남자의 집에는 불을 지르기도 하고, 친구를 성희롱하는 남성의 목에는 칼을 가져다대며 위협하여 쫓아낸다.

초반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은 책을 읽을수록 더욱 명확해지는데...남성에 대한 분노로 모였으나 그 저항의 방법이 불법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것, 여성과 계급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인종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흑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이며 실제로 폭스파이어 가입을 희망하는 소녀들 중 흑인은 거부한다 ), 성평등 추구를 넘어 남성을 상당히 적대시하고 증오한다는 것(남성과 사귀면 처단당한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구성원 간의 관계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 등등....이...이거 완전 워마드 잖아?

19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1993년에 쓰여진(우리나라에는 2017년에 출간) 조이스 캐롤 오츠의 <폭스파이어> 속 자경단 ‘폭스파이어’는 많은 면에서 워마드를 연상시킨다. 단 실제의 워마드가 아닌 세상이 ‘생각하는’ 워마드를. 최초에는 원대한 포부와 정의감에서 시작한 일이 불법과 폭력, 사기 - 물론 소설은 인물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만 - 로 끝난다는 것도 그렇고 절반 정도의 정의감과 절반 정도의 중2병이 섞여 있는 등장인물들도 그렇고.

이야기는 젠더, 계급, 인종 문제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데, 특히나 폭스파이어가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 혹시 ‘남성’ 배후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남친이 누구인지 빨리 털어놓으라며 추궁당하는 부분은 여성 혼자서는 흉악 범죄조차 저지를 수 없다는 당시의 편견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녀들을 무조건 옹호하고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 오츠는 인물들을 애정으로 대하면서도 그들의 모순되고 사악한 면모까지 여과없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떠나 매우 매우 재미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은 답답했고, 소녀들이 복수하는 대목은 짜릿했으며, 주요인물 중 하나인 렉스가 감옥에 간 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했다. 인물들은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그 중에서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인 렉스는 몹시 매력적이었다. 시점과 장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문장은 그녀가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나와있는데 이동진 평론가와 김혜리 평론가로부터 4.5점씩을 받은 상당한 수작으로 알고 있다. 어제 궁금해서 잠시 보다가 소설만큼 재미있지 않아서 중간에 껐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가 있을 때는 무조건 영화를 먼저 보아야 할 듯. 하여간 영화도 꽤 평이 좋은 듯 하니 소설을 읽기 귀찮은 사람들은 영화를 대신 봐도 좋을 듯 하다. 매우 추천이다. 불행하지만 용감한 소녀들이 꿈꾸었던 작은 혁명이 실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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