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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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류를 하게 된다. 좋은 책, 좋지 않은(나쁘다고 하는 것은 좀 그렇고) 책. 재미(흥미)있는 책, 지루한 책. 물론 매번 저렇게 똑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은 저 중간 어드매에 있을 때가 많다. 당연하지만 좋은 책이 늘 재미있지만은 않다. 좋지 않은 책이 재미있는 경우 또한 매우 많고.

올 봄에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대를 했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쓴 페미니즘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이라기에. 그런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 예상과는 영 달랐다.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읽히지가 않았다. 몇날 며칠을 노력했으나 결국 절반쯤 읽다가 포기했다. 그렇게 영영 잊혀질 뻔 하였으나....소설가들이 꼽은 올해의 베스트 소설 리스트에 들어간데다가(외국소설로는 유일하게!) 절반쯤 읽었던 게 아까워서 결국은 다시 한 번 도전하게 되었다. <19호실로 가다>와 그것과 세트격인 그녀의 또 다른 단편선 <사랑하는 습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도 단순하고 단어도 어렵지 않은데 희한하게도 머리에 안 들어온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곰곰이 뜯어보니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 조금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함께 몰고 온 유쾌한 분위기가 찰리에게는 개인적인 원수 같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 뒤쪽 어딘가에서 항상 잠복하고 있는 유령 같았다.” 와 같이 단어를 조합하고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진다. 이게 작가의 특징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현재로서는 판단이 어렵다.

게다가 많은 작가들이 인물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상황과 메세지를 드러내는데 반하여 레싱은 인물의 심리와 사고를 대부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묘사의 수준이 엄청나게 디테일하여 어떤 의사결정에 앞서 머리속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찰나의 망설임과 계산과 판단 등이 모두 서술된다. 밖에서 보면 단순해 보이는 행동에 3-4줄 가량이 할애된다. 아주 사소한 동작마저 유의미하게 평가된다. 인물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조차 그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다. 이러하다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피로를 느끼게 된다.

물론 좋은 소설이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렴 노벨상 수상 작가 아닌가. 1930-50년대 전후의 시대상과 가부장제 속의 모순된 인물들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특히 <19호실로 가다>의 가장 앞에 실린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는 소위 말하는 데이트 강간 이란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왜 여성들이 저항을 하지 않고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지를 굉장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 단편이었다. 그 외 다른 단편들에스도 인간의 모순되고 혼란스럽기 마련인, 말하자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과 같은 심리상태가 빼어나게 묘사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도리스 레싱은 영국작가인데 그녀의 책을 읽고서 영국 사람들하고는 가깝게 지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교토(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것으로 유명함) 사람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그녀의 글을 통하니 예의 바르고 체면을 차리는, 달리 말하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영국인의 면모가 참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방>이라는 단편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 아파트에는 두 여자가 살았다. 돈이 거의 없었는지, 카펫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벽을 장식한 것은 여행 포스터뿐이었다. 위층 여자 말로는, 두 여자가 밤새 파티를 열 때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파티의 소음이 좋았어요. 살아 있는 소리가 좋아요.” 비난하는 말투였다.” 비난하는 말투로 저런 말을 하다니...ㄷㄷㄷ

물론 도리스 레싱 자체가 유달리 통찰력이 발달하고 시니컬한 사람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여간에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뭐 하나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없다. 또한 흔히 소설에서 느껴지기 마련인 인물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도 굉장히 특이했다. 개별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 개인의 감정(냉소 이외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마치 개미나 햄스터 관찰일지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호실로 가다>보다는 <사랑하는 습관> 쪽이 이야기의 재미 면에서는 조금 더 낫다. (사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사실 책을 왜 두 권으로 나누어서 냈는지 모르겠다. 서문에 레싱이 직접 자신의 단편들에 짧게 코멘트한 글이 실려있는데 거기 등장하는 단편들이 <19호실로 가다>와 <사랑하는 습관>에 뒤섞여 있다. 따라서 두 권을 모두 읽지 않으면 서문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차라리 한 권으로 만들거나 공통된 제목을 붙여 1,2권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이렇게 하는게 더 잘 팔릴 것 같으니까 그랬겠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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