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자신의 그림자인 줄 모르고 쫓아가던 여자를 한 남자가 불러 세운다.
"그림자로구나. 그때 알았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 가지 마세요"

소설은 이렇게 기묘하게 시작한다.

이 두 남녀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40년 된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인 듯 아닌 듯 소설은 전개된다.
두 연인이 일하는 전자상가는 재개발로 철거될 형편이고, 둘의 이야기와 함께 주변 사람들인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사연이 하나씩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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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는 은교와 무재의 눈으로 관찰된다.
소설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것'.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니까 견딜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 46쪽

그림자의 분리는 철거를 앞둔 전자상가의 사람들이 그 폭력적 현실 앞에서 극복해 내지 못하고 기어이 무너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 '그림자'의 일어섬은 소설 이야기가 환상적이게 느껴지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불행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풀어 묘사하거니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소시민(?)의 삶의 불행과 좌절을 더 극적이고 더 충격적이게 느껴지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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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복되는 얼핏 유치해 보이는 대화들이다.
무덤덤히 이어지는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일상에서 흔히 듣는 단어들에 대한 반복되는 의문과 질문이 그 단어의 단순하지만 실체적인 진짜 의미를 보이려는 작가의 의도인 것 같다.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아니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 37~38쪽
은교 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 -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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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에서 예상했던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 소설에서는 대놓고 드러내 놓고 있지 않다. 그래서 둘이 연인 사이는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 두 연인의 모습과 행로, 소설의 마지막 모습에선 담담하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감의 끈을 놓지 않는 조금은 희망적인 두 연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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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은 침울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다. 소설의 문체에서 매력을 많이 느낄 수 있었고, 작품을 읽은 후엔 뚜렷하지 않게 안갯속 인물의 실루엣이 흐리게 보이는 듯한 느낌을 항상 받는다. 희한하지만 아름답다.
그녀의 작품은 읽어 나갈수록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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