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소한 것들의 구원 - 미학하는 사람 김용석의 하루의 사고
김용석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철학과 교수 출신의 저자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서 책으로 냈다. 보통 인문학이라고 하면 딱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신문 칼럼이라 그런가 쉬우면서도 재미있고 저자의 독특한 미학적 관점이 묻어난 글이 많아서 신선했다. 또한 3~4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칼럼인데 가벼운 읽을거리로 끝나지 않고 책장을 덮으면 요즘 현상과 연결지어서 각종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의 원조인 나르키소스 신화 얘기도 나오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각색 버전 소개가 흥미롭다. 호수에 비친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돼 호수에 빠져죽자 호수가 그를 애도하는데 실상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이 사람 자체도 자기애가 충만한 작가인데 역시나 그가 각색했다는 나르키소스 신화 이야기도 웃음이 난다. 호수와 나르키소스에게는 '자기애'만 존재했고 타자는 나를 비춰주는 매체로서만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신화를 현대인의 자기애 표출과 연관지어서 셀카와 SNS, 문자메세지의 일방성으로 설명한다. 기가 막힌 설명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SNS에 오늘 뭐 먹었는지 무엇을 샀는지 나의 일상을 자발적으로 공개하고 자랑하고, 셀카라는 것도 아름다운 내 모습을 찍고 감상하기 위함이고, 문자 메시지도 전화 같은 상호소통과는 분명 다르다. 처음에는 상대의 반응을 정확히 모르는채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점에서 나의 일방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단계로 보면 자기애, 타인을 보지 않는 일방성, 타자성의 축소, 외부의 부정적 자극에 민감해지고 상처받기 쉬워짐으로 나아간다.
또한 나는 이런 일방성이 자기도 모르는 새 잔인함과 이어지는 부작용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각색 버전에 나온 호수의 태도는 참으로 섬뜩하지 않은가? 나르키소스의 죽음은 호수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감상하던 거울 같은 도구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죽었는데 실상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데서 요즘 일부 사람들의 잔인함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폐지 줍는 할머니를 구타한 젊은 남자, 아무 상관없는 고양이를 학대한 사람, 게임 상에서 다퉜을 뿐인데 직접 만나서 칼부림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기만 소중하고 타자는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나르키소스나 호수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람을 찾습니다" 란 칼럼은 정부가 고위 공직자를 뽑을 때 교묘히 강조하고 있는 '도덕성과 업무 수행 능력은 별개'라는 논리의 헛점을 집어주었다. 마치 정부는 인사청문회도 통과하지 못한 다수의 후보자들을 도덕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능력으로 보면 이만한 인재도 없으니 그냥 뽑자는 식으로 밀어붙이는데 저자는 이를 비판한다.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 사람이 공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이유는 윤리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 국가의 공직은 당연히 공공성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공공의식이 없는 사람은 사적이득을 취하기 위한 비리를 저지르기 쉽고 이러한 도덕적 흠결은 공적 업무 수행 능력의 부족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도덕성과 능력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면서 저자가 소개한 체코 전대통령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 정치는 세상을 책임지고자 하는 개인의 도덕에 근거합니다. 정치가 공동체를 속이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에 공헌하려는 열망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가르쳐 봅시다."
세금 탈루,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과도하고 어마어마한 주식 투자, 논문 표절, 병역 비리 등 범죄자를 뽑는 것인지 장관을 뽑는 것인지 의아한 사람들을 후보로 내세워서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이니 이들에게 중책을 맡기자는 헛소리는 이제 집어치워주었으면 좋겠다. 저런 취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게 아닌데' 싶었는데 저자가 시원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준 글을 읽고 통쾌했다. 이 책을 많은 분들이 읽고 평소 찜찜했지만 왜인지는 몰라서 넘어갔던 사소한 것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과연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이 진짜 사소한 것인지 다들 한번씩 집고 넘어가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