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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은 끝! - 일을 통해 자아실현 한다는 거짓말
폴커 키츠 지음, 신동화 옮김 / 판미동 / 2019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직업과 일에 대한 담론은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히 있어왔다. IMF나 그 후의 끝없는 경기불황을 거쳐 노동환경이 급변해왔고 주52시간이 실시된 이후에는 일에 대한 개념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폴커 키츠라는 저자는 독일 사람인데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법률가라고 한다. 그가 이 작은 책에서 하는 주장은 내가 느끼기로는 별로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밀레니얼 세대가 가진 일에 대한 생각이나 직업관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여겨졌다. 평생 직장도 없고 평생 직업도 없고, 나인 투 식스 주 52시간, 칼퇴, 회식 참석은 자율적으로, 퇴근 후가 진짜 나의 생활, 휴가 중에는 연락 안 됨, 자아 실현은 내가 할 테니 회사는 월급을 밀리지 않으면 된다 등등. 이런 개념이 독일에서는 대중적이지 않다면 오히려 우리나라가 더 앞서가는 것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은 점점 냉철하고 능률적인 능력주의, 개인주의로 가고 있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일"이라는 독일 명사는 좋은 느낌을 주지만, "일하다"라는 동사는 부정적인 기분을 불러온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독일어에만 저런 어감이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내게는 '일'이든 '일하다'이든 단어 자체만으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고 '여행'이나 '여행하다' 처럼 비슷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명사, 동사 변화 하나만으로 일에 대해 어떤 느낌을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인 개념이다. 또한 일 자체에는 긍정이나 부정의 개념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는 일이 만족스러우면 명사로 쓰이든, 동사로 쓰이든 본인에게는 긍정적이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단어의 형태가 아무리 바뀐들 단어에 대한 느낌 자체가 바뀔 리는 없지 않을까?
사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고 사실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상당히 많았다. 설명을 다 읽으면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기에 마치 황희 정승같은 마음으로 내 생각은 이렇지만 당신 생각은 그렇군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마도 저자가 풀어가는 일에 대한 담론은 대개 직장생활에 국한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직업군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프리랜서나 자영업자, 예술가 등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내용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그는 직장 생활에 대해 일반인이 갖는 거짓한 환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든다.
1. 열정을 불태우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2.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장한다.
3. 자유롭게 무언가 만들어낸다.
4. 일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는다.
5.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
6. 나는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7.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위의 7가지는 저자에 따르면 전부 거짓된 환상에 해당한다. 그러나 설명을 읽어보면 어설픈 일반화의 오류도 눈에 띄고 너무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예를 들어 첫번째 '정을 불태우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경우 저자는 자신이 참가한 워크숍 이야기를 들어 이야기한다. 어떤 워크숍에서 저명한 강연자가 저자에 앞서서 든 일례인데 유명 심장 외과의가 본업에서 행복을 찾지 못해 56세에 트럭운전사가 되었다고 한다. 트럭 운전사는 어릴 때부터 그의 꿈이었고 의사는 이제 트럭 운전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의 변신은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다음 연사인 저자는 그 이야기를 살짝 바꿔본다. 한 트럭 운전사가 50대 중반에 내 평생의 꿈이 심장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고. 당연히 예시의 대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저 꿈 얘기는 완전히 허튼 소리가 된다. 외과의사가 트럭 운전사가 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청중은 웃고 만다.
이 예시를 바탕으로 저자는 열정을 불태우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고라고 일축한다. 일에는 세심함과 확실함, 집중력과 주의력이 필요하지 부글부글한 열정만으로 훌륭한 업무 수행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저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열정이라는 단어 역시 일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 말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차가운 이성에는 조금도 열정이 끼어들면 안 되는 걸까? 단어를 살짝 바꿔서 열정을 열의로 해보자. 내가 아는 어떤 숍의 직원은 사장의 감시 없이 혼자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방문할 때마다 그에게서는 열정은커녕 일에 대해 아무런 열의를 느낄 수 없었다. 자기 일에 1%의 열정도 없는 사람이 다른 미덕인 세심함, 확실함, 주의력을 갖고 있을 리 있을까? 재고 파악조차 못하고 있고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준 적은 더더구나 없었다. 앞서 외과의사는 과도한 경쟁에 짓눌려 트럭운전사를 그만뒀다고 한다. 저자는 열정이라는 단어에 "지나친"이라는 부사어가 필요함을 간과한다. 지나친 열정에 비해 다른 미덕이 전혀 없다면 당연히 만족스러운 삶도 커리어도 되지 못할 것이지만 어떤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데도 열정은 필요하다. 아무리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을 한다해도 그 성실함을 유지하는데만도 열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후의 2~7번까지도 할 말이 많지만 그러면 서평이라기보다는 반대 논문을 써야 할 판이고 저자의 주장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는 내용도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예를 들지는 않겠다. 저자의 주요 내용은 일을 통해 자아실현 한다는 사탕발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고 회사는 내가 일한 만큼 정당한 보수를 제때 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닌가? 이미 평생직장, 평생직업이 물 건너간지 오래이다. 또한 외국보다 자영업자 수가 폭발적으로 많은 우리나라 특성상 프렌차이즈 빵집을 운영하고 치킨을 튀기며 자아실현 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정해준 범위와 시간 내에서 월급 루팡 소리 듣지 않게 칼같이 일하고 또 퇴근하면 나만의 자아실현을 위해 취미활동이든 제2의 직업활동이든 하든 분들이 많아졌다. 일은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고 꿈은 제2의 활동으로 찾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게 한국의 현실이다. 심지어 일은커녕 꿈이 없어도 자아실현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6번째 환상으로 등장하는 '나는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말에는 그저 웃고 만다. 요즘도 이런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 첫직장에서 깨달은 내용을 저자는 이제와서 주장을 하고 이 책이 독일 베스트셀러라니.. 회사 생활은 거대 기업 사장 조차도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데 하물며 그 하위 톱니바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싶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런 저런 환상에 젖기에 한국은 독일보다 몇 배는 더 치열한 사회라는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책장을 덮는다. 저런 환상에 빠질 정도면 살기 편한 게 아닌가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