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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 온 뒤를 걷는다 - 눅눅한 마음을 대하는 정신과 의사의 시선
이효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정신과에 다니던 환자의 에세이나 진료과목이 내과인 의사의 에세이는 읽어봤지만 정신과 의사의 에세이는 처음이다. 나도 여전히 신경정신과가 정식명칭인 줄 알고 있었는데 요즘은 "정신건강의학과"라고 불린단다. 아무리 그 이름을 산뜻하게 바꾼들 일반인이 가진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쉽사리 바뀌긴 어려울 듯 하다.

저자는 정신과 분야 중 가장 고난도에 해당하는 조현병 환자들을 주로 돌본다. '조현병이 뭐지?'하고 익숙치 않은 분들도 정신분열병이라고 단어를 바꾸면 금방 알아들으실 거 같다. 정신이 분열되는 병이라니.. 단어만 들어도 뜨끔하다.
드라마에 나오는 환청이나 망상에 사로잡힌 폭력적인 환자의 모습은 조현병의 양성증상이 발현된 것이고 사고빈곤이나 의욕상실, 무감동증 같이 사람이 식물화 되는 것은 음성증상이라고 한다. 초반에는 양성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만성화 단계에 이르면 두 가지 증상이 다 나타나거나 정서적인 반응이 점점 없어지는 음성증상 쪽으로 간다는 설명에 마음이 안 좋았다.
차라리 화를 내고 과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인간다운 것은 아닐까?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종일 앉아만 있거나 종국에는 가족과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다니 여전히 이 병은 무섭다.
저자가 정신과 의사이다보니 병원 이야기나 공부하는 과정, 혹은 이렇게 조현병에 대한 증상이나 실제 이 병을 앓고 있는 만성 환자에 대한 일화도 있지만 그 분량이 많지는 않고 오히려 정신과 의사의 시선으로 보는 외부 세계 이야기가 가장 많이 실렸다. 잡학다식한 분이고 정신과 의사답게 관찰력이 뛰어나서 일상적인 에세이조차 굉장히 세련되고 정밀하게 묘사하는 글이 많았다.
그 중 나는 희한하게도 "미식가의 사색"이라는 책 속의 특집 코너같은 페이지가 제일 재미있었다. 나 자체가 식도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 분이 묘사하는 현실적인 음식의 맛은 답답한 만성질환의 세계를 불현듯 함께 벗어나 책을 읽는 독자들도 갑자기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우울증이나 조현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만 삶이 좀처럼 진전이 안되고 답답하다고 느낄까?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모두 비온 뒤를 걷는 것처럼 태풍 같은 세월, 강렬한 소나기보다 "비 온 뒤"의 진창길을 걷는 지리멸렬한 수습의 시간이 아니던가? 예기치 않은 고통의 시간을 겪고 그 상처가 너무 커서 병이 된 사람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치료가 잘 안되고 시간이 거의 평생이 걸리더라도 묵묵히 인내하며 나아가야 하고 또 그러다보면 나아져서 좀 더 나은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환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도 인생의 굴곡을 겪고 지루한 인생을 감내해야 하듯이..
다시 내가 가장 재밌었던 음식 이야기로 돌아와서, 143p의 "참는 자에겐 식은 핫도그가 남나니"를 잠시 보여드린다.
바로 중년의 이효근 선생이 꼬꼬마(?) 재수생이던 시절, 재수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정류장에 앞 노점에서 싸구려 핫도그를 팔았는데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는 거다. 혈기왕성한 시절이라 집에 갈 때 즈음이면 너무 배도 고프고 핫도그가 먹고 싶었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1년 동안 핫도그를 단 한번도 사먹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대학가서 자유를 만끽할 때 재수생인 그는 자중과 자제의 상징으로 "핫도그 안 먹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독하다. 1년 동안 내내 버스정류장에서 돼지고기에 밀가루를 씌워 기름에 튀긴 그 고소한 냄새를 참고 매번 버스에 오른 선생. 그는 "만족지연"이란 유명한 실험을 자신에게 한 셈이다. 물론 핫도그 맛이야 거기서 거기이고 1년 후에 먹어봤자 별로 맛도 없었다는 결론은 나도 이미 선생이 말하기 전에 내 몸으로 시험해 본 터라 알고 있다. 하지만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베스트셀러에서 소개된 마시멜로 실험이 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실험이었다는 뒷 이야기는 선생의 설명을 듣고야 알았다. 인내심과 향후 사회적 성취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니 충격 아닌가? 실험에 참가한 백인 중산층 아이들은 나중에 보상을 충분히 해줄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흑인 저소득층 아이들에겐 당장 먹어치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논리가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애초에 그들은 출발점이 다른데 엉뚱한 경쟁을 한 셈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인내심과 미래 사회적 성취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 같은 기분은 왜 드는 것일까? 그 때 핫도그를 먹지 않고 당당히 대학에 합격한 후에 먹겠다던 재수생이 지금 유명 정신과 의사가 되어서일까?
참았던 핫도그 맛이 나중에 먹어봐야 먹고 싶을 그 당시보다 훨씬 맛없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현재의 즐거움에 몰두해서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인들 성공할 수 있으랴.. 시험결과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진 건 납득할 만한 요소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마시멜로 실험 말고 뒤이어 바로 나오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었다. 행정학 책에도 소개되었던 이 유명실험도 조작이었다니?
하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할 필요는 없고 궁금한 독자를 직접 이 책을 읽어보시라. 그리고 그런 자잘한 정신과적 실험 이야기보다 저자의 외할머니가 "니 이 무 봔?"하고 물어보며 해주셨다는 덴뿌라와 이북만두 이야기를 읽으면 진짜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이 고이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인생이 비 온 뒤의 진창길을 걷는 것이라지만 비온 뒤에 구름을 뚫고 나오는 그 환한 햇살이 아예 없다면 너무 우울하지 않으리? 그가 할머니 돌아가시고도 오랫동안 할머니의 소울푸드 흉내라도 내는 음식을 찾아헤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강렬한 나쁜 기억을 애써 몰아내고 조그만 좋은 기억을 잊지 않도록 자꾸만 되새겨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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