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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와 다시 읽는 고전 ㅣ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3
나민애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8월
평점 :
고전이라고 하면 부담이 앞선다.
<죄와 벌>, <안나 카레리나>, <파우스트>, <1984>, <프랑켄슈타인>, <돈키호테>… 제목은 익숙하지만 막상 펼치려면 방대한 분량과 낯선 시대적 배경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은 그 거리감을 줄여주는 책이다.
저자의 관심은 완독이나 문학사적 지식이 아니라 “이 작품이 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가”에 있다.
책을 여는 문장부터 인상적이다. 고전은 강 같은 것이다. 아폴리네르가 <미라보 다리>를 쓰던 시절에도, 지금도 센강은 흐른다. 사람과 시대는 바뀌어도 강은 제자리를 지나가듯, 몇백 년 전 작품 속에도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랑과 욕망, 두려움과 삶의 의미가 흐른다.
책의 출발점은 사랑이다.
<시경>의 <관저>에서 <향연>, <신곡>, <죄와 벌>, <안나 카레리나>로 이어지며 사랑은 매번 다른 얼굴을 보인다. <향연>에서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존재이고,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연인을 넘어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존재다. <죄와 벌>의 소냐에게 사랑은 무조건적 용서가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책임지게 만드는 힘이다.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뜨겁지만 불안하다.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는 순간 상대의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고,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자기 존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도, 집어삼킬 수도 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악’으로 넘어간다.
에덴동산의 뱀에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까지, 과거의 악은 인간 바깥에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악마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1984>에 이르면 악은 한 명의 악당조차 아닌 감시와 통제의 시스템이 된다. 빅 브라더가 없어도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이 취향과 행동을 예측하는 지금, 누군가 보고 있다는 감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SNS에 좋은 모습만 골라 올리다 보면 실제의 나와 보여주기 위한 나 사이에 거리가 벌어진다. 1949년에 나온 <1984>가 여전히 무서운 이유다.
<프랑켄슈타인>을 바라보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그 이름을 괴물로 기억하지만 정작 괴물에겐 이름이 없고, 그는 처음부터 악했던 존재도 아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를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은 것은 오히려 창조주였다. 그러니 크리처의 질문은 “왜 나를 만들었나”보다 “왜 만들어 놓고 버렸나”에 가깝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만든 것에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느냐를 묻는 이 질문은, AI와 생명공학의 시대를 사는 지금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침묵의 봄>에서 고전의 범위는 문학에서 현실로 넓어진다. 레이첼 카슨이 고발한 DDT의 자리에 저자는 미세플라스틱을 놓아본다. 물질은 바뀌었어도 인간이 편리함을 얻는 대가를 자연과 다른 생명에게 떠넘기는 구조는 반복된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이므로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야기는 모아진다.
<돈키호테>와 루쉰의 <광인일기>를 나란히 읽는 방식도 흥미롭다.
두 주인공은 모두 당대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만, 저자는 그 ‘미침’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기존 질서를 의심하는 사람은 언제나 처음엔 이상한 사람으로 불린다. 정상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정하는가—새로운 시대를 먼저 본 사람이 자기 시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불릴 수 있다는 해석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책의 후반부에는 전쟁이 등장한다.
헤밍웨이가 그리는 전쟁에는 영웅적 장면보다 상실이 먼저 있고, 살아남았지만 믿었던 세계를 잃은 이들에게서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이 태어난다.
그리고 시선은 마지막으로 빅터 프랭클에게 향한다.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을 겪은 그가 끝내 붙잡은 것은 ‘의미’였다.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좋은 환경이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데 있으며,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 정해줄 수 없다.
그래서 사랑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전쟁과 절망을 거쳐 다시 사랑으로 돌아온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향연>과 <죄와 벌>의 사랑이 <1984>의 감시, <프랑켄슈타인>의 버림받음, <침묵의 봄>의 파괴, 전쟁의 폐허를 모두 통과한 뒤 다시 도착한 결론이기에 이 문장은 단순한 위로로 읽히지 않는다.
이 책이 가장 좋았던 점은 고전을 떠받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훌륭하다고 말하는 대신 인물의 선택에 의문을 던지고 지금의 기준으로 다시 바라보면서도, 수백 년 전 작품이 살아남은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기술을 만들어 놓고 책임을 고민하며,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생각을 배우는 일이라기보다, 지금의 나를 아주 먼 시대의 거울에 비춰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강물은 같아 보여도 매 순간 다른 물이 흐르듯, 스무 살에 읽은 <죄와 벌>과 마흔에 읽은 그것은 같은 책이 아니다. 작품은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은 한 번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단어도 결국 ‘고전’보다 ‘다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