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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박찬욱 지음, 이윤호 그림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평점 :
#도서협찬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을유문화사_서평단
보통 스토리보드북이라 하면 촬영 전 참고용 밑그림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처럼 읽힌다. 장면의 구도와 동선, 인물의 시선, 대사의 리듬까지 이미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어, 영화를 보기 전의 초안이라기보다 해부도에 가깝다.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흰 바탕 위에 집과 정원, 가족과 아이들이 소박한 삽화처럼 배치되어 있는데, 얼핏 평온한 가족 앨범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남긴다.
영화가 품고 있는 불안과 아이러니가 이미 표지에서부터 은근하게 스며 나오는 듯 하다.
내지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취업훈련원 장면이다. 강사는 “나는”이라고 적힌 보드를 들고 참가자들 앞에 선다. 그리고 가려진 부분을 떼어내자 “좋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따라 외친다. 이어서 “실직은 내 잘못이 아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은 내가 새 기회를 찾는 동안 온 마음으로 날 지지한다” 같은 문장도 반복된다. 언뜻 보면 위로와 회복을 위한 긍정 훈련처럼 보이지만, 스토리보드로 읽으면 전혀 다른 감각이 생긴다.
따뜻한 치유의 순간이라기보다, 상처 입은 개인에게 끝내 스스로를 설득하라고 요구하는 집단적 자기암시처럼 보인다.
이 책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완성된 영화에서는 배우의 표정과 음향, 편집의 호흡이 먼저 감정을 끌어가지만, 스토리보드북에서는 장면의 뼈대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난다.
누가 중앙에 서 있는지, 시선이 어디로 모이는지, 어떤 문장이 어떻게 공개되고 반복되는지, 그리고 그 반복이 어떤 압박을 만드는지가 또렷이 보인다. 특히 원형으로 둘러앉은 해고자들과 그 중심에서 보드를 흔드는 강사의 구도는, 위로의 언어가 어떻게 통제의 언어로 바뀌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의 연출이 대사보다 먼저 배치와 리듬에서 시작된다는 점도 새삼 느낄 수 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조차 위안이 아니라 불안한 주문처럼 들리고, “실직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오히려 그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현실의 잔혹함을 드러낸다. 사회가 낸 상처를 개인이 자기 확신으로 봉합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이 몇 장의 스토리보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의 물성도 매력적이다.
차분한 표지, 여백이 살아 있는 구성, 흑백 중심의 내지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컬러가 아니라 흑백이기 때문에 분위기에 압도되기보다 구도와 문장, 컷의 연결을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예쁜 소장품이면서 동시에, 영화 연출의 논리를 종이 위에서 차분히 따라가게 만드는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각본집과 별도로 출간된 이유를 알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깊은 감상의 통로가 되고, 연출과 장면 구성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된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영화가 더 잘 보인다. 그리고 박찬욱이 왜 그렇게 불편하고도 정확한 장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 출발점이 어디였는지도 조금은 알게 된다.
박찬욱에 진심인 을유문화사가 펴냄.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