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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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틈새를 넘나드는 엘비라 나바로의 환상 세계

표제작인 <토끼들의 섬>에서부터 <꼭대기 방>, <미오트라구스>에 이르기까지, 환상과 현실을 섬세하게 교차시키며 독자를 혼란스럽게도, 매혹적으로도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와 틈새를 탐색하고, 그 틈새 속에서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나바로는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기괴함과 폭력성을 끌어내는 데 능하다.

<토끼들의 섬>에서 무인도의 '가짜 발명가'가 새들을 없애기 위해 빨간 눈의 토끼를 풀어놓는 장면을 마주한다. 빨간 눈을 가진 토끼가 새를 사냥하고 잔혹하게 잡아먹는 모습은 자연스러워야 할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개입하며 발생한 일그러진 장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는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인간과 환경의 관계로 이끈다. 단순히 독립된 생명체로서의 토끼가 아니라, 환경을 조작하고 변형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

<스트리크닌>에서는 한 여성의 귀에서 발이 돋아나는 기이한 장면을 묘사한다. 그녀는 이를 가리기 위해 히잡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지만, 그 여정에서 마주하는 여러 사람들은 그 변이를 두려워하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는 단순한 환상적 설정이 아니라, '다름'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드러내는 은유적 장치로 읽힌다.
실제로 이 사회에서 다른 외모,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겪는 차별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며, 나바로는 이를 환상적 설정 속에 숨겨 더욱 인상적으로 전한다.

<헤라르도의 편지>에서는 이별을 앞둔 연인이 외딴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이들이 마주하는 음산한 숙소와 기이한 숙박객들, 그리고 음침한 욕실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간관계의 불안과 공포가 어떤 형태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남자친구를 향한 두려움과 불신은 초자연적 환경 속에서 극대화된다.

<미오트라구스>에서는 허구와 역사가 얽힌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대공이 벌이는 끔찍한 '놀이'는 단순히 잔혹한 상상에 그치지 않고, 사회에서 자주 소외되는 존재들을 은유하며 이들에 대한 무관심이 초래하는 결과를 경고한다.

<꼭대기 방>에서 주인공은 열악한 호텔 근무 환경 속에서 외로이 버티며, 자신이 지낸 공간이 꿈속의 불안 요소로 자리 잡는 장면을 보여준다.
젊은 세대의 고단한 노동 현실과 그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나바로는 우리에게 쉽게 보이지 않는 현실의 이면을 환상의 틀 안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우리가 외면하고 지나쳤던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그는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관심사가 여실히 드러나는 단편소설집.

이 책을 통해 스페인소설을 처음 접해보는 것 같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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