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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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속 묵 할머니는 시대의 거친 물결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 인물이에요.
최근 읽은 《유령의 시간》 속 이섭이 과거의 유령 같은 삶에 갇혀 스스로를 구해내지 못한 채 떠돌았다면, 묵 할머니는 주어진 고난과 맞서며 변화를 선택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묵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일본 군인에게 끌려가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돌며 살아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간요’, ‘데보라’, ‘용말’, ‘미란’ 등 다양한 이름을 거치며 그때마다 새로운 역할을 맡아 스스로를 지켜냈죠. 그녀가 가진 몇 개의 이름들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맞선 그녀의 생존 의지를 상징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제 친할머니가 떠올랐어요. 1916년생이셨던 저의 할머니, 홍처녀. 여든이 넘으셔서야 한글을 배우셨음에도 주기도문과 성경 구절을 능숙하게 암송하셨죠.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험난한 시기를 견디고 1960년대 초에 할아버지와 사별하셨음에도 자식들과 손주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에요. 이제서야 그 시절 할머니가 보셨을 세상이 궁금해졌지만, 여쭤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묵 할머니의 삶을 통해, 그 시절을 묵묵히 견뎌온 할머니 세대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유령의 시간》의 이섭이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살아갔다면, 묵 할머니는 치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고난과 마주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갑니다. 그녀는 주어진 현실에 떠밀리지 않고, 순간순간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의 삶을 지켜냈죠.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이 마냥 허구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묵 할머니가 남긴 삶의 흔적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와요. 미국에 살고 있는 딸과 사위가 등장하면서, 독자를 대신해 묵 할머니의 이야기에 의문을 품었던 소설 속 화자는 그녀의 말이 실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묵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 세대가 남긴 흔적을 되돌아보며 지금 우리는 어떤 흔적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부고란에 내 인생은 어떻게 적힐까요? 묵 할머니의 삶은 단순히 이름과 경력으로 요약될 수 없었어요. 나열된 일곱 단어로는 그녀의 삶 전체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남긴 강한 의지와 생존의 흔적이 그녀를 더 큰 존재로 기억하게 해주니까요.

저 역시 삶의 흔적이 단순한 정보가 아닌, 치열하게 살아낸 한 인간의 기록으로 남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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