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섭'은 늘 취해있었다.집에는 그를 기다리는 '미진'이 있었고 뱃속에 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아이가 태어나자 '이섭'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집에 일찍 들어갔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미진'을 돌보기 시작한다.'미진'은 고맙다고 '이섭'에게 말한다. 갓 태어난 아이마저 모른 척 하면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걱정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이섭'의 동생이라는 '윤'이 자식들을 데리고 잠시 머무른다. 일주일 남짓 머무르다 가는 '윤'을 배웅하고서 '이섭'은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미진'은 그날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그들의 둘째 딸 '지형'은 까닭모를 광경에 혼란스러워한다.'지형'은 마침 호적등본을 발견한다. 아버지 '이섭'의 이름 아래 처음보는 한자가 쓰여있다. 오빠에게 물어보니 엄마 '미진'의 이름은 없다는 대답을 한다. 세 아이의 이름이 더 있었다. '지형'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기 전의 삶이 궁금해진다.집에 들어온 '이섭'은 '미진'에게 관공서에 가자고 한다. 혼인신고를 하자고. 그들이 함께 살다 아들 하나. 딸 셋을 나은지 한참이 지난 때였다.'윤'은 헤어질 때 '이섭'을 "형부"라 불렀다. '윤'은 '이섭'의 전처 '진'과 가장 닮았던 막내동생.'진'과 '이섭' 사이에도 자녀가 셋이 있었다. 사내아이 둘. 막내딸. '이섭'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들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이섭'이 수배중일 때 '이섭' 대신 '진'이 붙잡혔다. '진'이 당사자도 아닌 배우자라 곧 풀려날 줄 알았으나, 상황은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전쟁이 벌어졌다. 피난을 하는 중에 '이섭'과 이섭을 찾아나선 '진'과 자녀들의 길이 엇갈린다. 사회주의자였던 '이섭'은 소수의 배만 불리고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북의 현실을 마주하고 이념 따위보다 가족의 안위가 중하다며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하한다.그사이 풀려난 '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섭'을 찾다가 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이섭'은 차마 '진'을 실종신고하거나 사망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오래 지켜보았던 '미진'은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이섭'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북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처와 아이들을 가슴에 품기로 한 '이섭'의 심정을 헤아렸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그제서야 법적으로 '이섭'과 부부가 되었다는 안도에서 나온 눈물이리라.'이섭'은 5년간 수감되었었다. 그들의 가족은 자주 이사를 가야했다. 연좌제 폐지가 헌법에 명시되기 전이었다. 구직이 어려워 전처의 장인 도움을 받아야했다. '진'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장인의 속마음을 '이섭'은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이제는 그의 도움을 받을 염치가 없다.'이섭'이 일하던 양식장 인근 토지가 수용될 예정이다. 새우 양식. 성과가 나지 않음에도 지금껏 기다려준 것도 양식장 주인과 장인과의 친분 덕이었다. '이섭'은 다시 직장을 구해야하리라.상경을 결심한다. 허물어져가는 아파트. '이섭'은 가구 납품업체에서 일을 한다. 아들이 삐까번쩍하게 닦아준 구두에 먼지가 쌓일 정도로 영업에 열심이지만 계약을 따내는 것이 버겁다. 어릴적부터 몸이 약했던 '이섭'의 어깨가 꺼질 듯 하다. 북에 있을 가족들은 건사하지 못했지만 남에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해서든 책임지마고 다짐했다.딸 '지우'가 밥을 먹다가 혼절했다. '이섭'과 '미진'은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안고 달린다. 병원에 입원한 아이는 아비를 걱정한다. 병원비 많이 나와서 아비가 힘들까봐. 화장터를 다녀온 '이섭'과 '미진'은 10년은 더 늙어보인다. '이섭'은 또 다시 아이를 잃었다.해방 30주년. '이섭'은 해방 전 30년, 해방 후 30년을 살아냈다. '미진'과 세자녀를 안방으로 불러모은 후 오늘부터 자신의 삶을 기록해나갈 것을 선언하고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적기 시작한다.제목 : 유령의 시간.사상범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처지를 상징하는 말인가, 북에 전처와 자녀들을 두고 온 후의 공허한 삶을 의미하는 것인가. 제목을 적은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이섭'은 원고지에 적었다가 찢었다가 반복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섭'은 세상을 떠난다. 책의 제목은 유령의 '시간'인데 어찌된 이유인지 나는 계속 '아이'라고 착각하며 읽어갔다. 아비의 생애를 자신의 관점에서 기술해나가는 '지형'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아비가 끝내 밟지 못했던 북의 땅을 대신 밟고 이복형제일지도 모르는 오빠에게 닿을지 모를 편지를 쓰는 '지형'은 아비가 죽은지 30년의 삶을 살아낸다. 역병과도 같았던 시절들이 과거가 되었다. 이제는 먼 옛날이 된 듯 하다. 지났으니 잊어도 되는 것일까.시대에 휩쓸려간 사람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조금씩 스러져간다.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도 존재했던 이들이 있었다. 생각처럼 오래되지 않은 우리 이야기. 유령의 시간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