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손더스님 강의를 듣는다.강의. 그렇다. 단편소설을 읽다가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여기서 잠깐.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그런데 말야. 네가 생각한게 맞을까? 아니야?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보자.이건 말야.뭔가 예언서처럼 읽히기도 한다.예를 들자면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 주인공의 지난 13년의 하루를 먼저 묘사한다. 그리고 하필 오늘이 다른 특별한 날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여느 날과 같은 하루로 끝이 날 것인가를 놓고 독자에게 묻는다.바로 아래 문장이다._ _ _이야기를 여기에서 잠깐 멈추고 현재 상태로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끝에 이르면 이것이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고 주장하겠다.여기에는 단편 소설 형식 자체에 관해 배워야 할 핵심적인 것이 있다. 아직 이야기가 아닌 것을 훌륭한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제 곧, 이다음 페이지에서 나타날 것이다. _ _ _어떤가? 독자는 홀로 단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손더스 혹은 다른 수강생과 함께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이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읽어야 한다. 간혹 이미 읽었던 페이지로 건너가서 다시 읽어야 하기 때문)다음에 인용한 문단을 보면 우린 이야기에 갇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야기의 화자가 되면 선택을 해야 한다._ _ _ 우리는 이야기가 변화의 순간을 둘러싼 틀을 이룬다고,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상황이 영원히 바뀌었다.” 변형으로는 “이날 상황이 영원히 바뀔 뻔했지만 바뀌지 않았다”가 있다. 철로에 이르기 전까지 〈마차에서〉는 그 변형의 변형으로 “이날 상황은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는데, 물론 절대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희망 고문을 하는 짧고 기만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철로에서 이 이야기는 “이날 상황이 실제로 영원히 바뀌었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은 아니며, 더 좋은 쪽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쪽이 될 수도 있다”가 된다.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늘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하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다가 어떤 기적적인 순간에 한때 우리도 무언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더 행복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더 슬픈 이야기일까?글쎄, 경우에 따라 다르다. _ _ _ 때론 그 선택이 양자택일이 아닐지도 모른다.이건 마치 미국 유학을 상의하기 위해 안선생님을 찾아갔다 귀가하는 서태웅이 윤대협을 마주치고 이어지는 1대1에서 윤대협에게 듣는 대사와 같다. 돌파하느냐 막히느냐의 둘 중 하나의 상황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농구는 다섯이 하는 것. 서태웅은 결정적인 순간 패스를 택한다.강의를 듣는다. 단편을 읽는다. 그리고 의문을 던진다._ _ _ 이제 스스로 물어보라. 내가 내 버전을 쓰면서 무엇을 중시했는가? 즉, 내가 무엇에 의지했는가? 내가 어떻게 그 버전으로 ‘결정’했는가?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