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살아낸, 끝날 수 없는 생존의 기록
김잔디 지음 / 천년의상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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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호소인.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용어. 단언컨대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는 인권을 10년 정도는 후퇴시켰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적어도 호칭에 대한 문제가 논란이 될 줄은 몰랐었다.

제3자가 이럴진대, 당사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피해자가 "도와달라"며 지르는 비명은 어느순간 음소거가 되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훗날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 대부분의 사건들의 시작이 이와 같다.


"가해자의 죽음". 사람들의 관심이 커져갔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은 혹시 알까? 피해자 역시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했다는 것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는 것을.


피해자가 여성단체를 찾아갔을 때, 피해사실을 들었던 관계자들은 분노했다. 대한민국은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안 전 지사에게 김지은씨가 분노했던 것과 같은 지점. 미투 이후 내가 너에게 잘못을 한 것 같다는 반성의 말을 했음에도 다시 범한 것. 잘못을 반성했어야 할 계기가 주어진 이후에도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김잔디씨는 <김지은입니다>를 3개월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한문장 한문장이 자신의 심정과 너무도 같아서, 미리 이 책을 읽었다면 본인의 선택이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후회가 밀려와서.


그렇다. 둘은 닮았다. 이 책에서 둘이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느순간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니 무시되었다. 그는 세상에 없으나 남은 이들은 여전히 그를 놓지 못했다.

권력. 그것이 뭐길래. 그가 생전에 가졌던 그것의 후광이나마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쪽의 힘과 의지는 너무 강했다. <백래시>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피해자가 선택한 가명(성범죄 사건의 경우 '가명'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공소장, 판결문에도 '가명'이 기재된다. 김잔디는 피해자가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드라마 속 인물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라 한다. 그것도 나중에 알고보니 '김잔디'가 아니라 '금잔디'였다고 한다.)은 그가 오랜만에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알고 있잖은가. 피해를 입기 전, 아니 피해를 당했음에도 그들이 업무에 충실하고자 했던 평소의 행동들이 사건 이후에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 맡은 일에 성실하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매도되었는지.

그녀들이 채워넣은 이력서의 경력들이 열심히 살아온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출세지향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둔갑되는 것을 이미 봐왔다. 충분히 알고 있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오래 전에 JMS 관련된 시사고발 프로를 본 적이 있다. 모자이크 처리되어 뒷모습만 등장한 피해자가 변조된 음성으로 고백하는 그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믿어서 행복해야 하는데, 왜 저는 그럴 수 없을까요. 왜 제가 이렇게 버거울까요." 울면서 했던 뉘앙스의 말.


피해자들에게 일상의 회복이란 어떤 의미일까? 김잔디 씨는 밝은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가 언론에 발표한 성명문을 봐도 알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존중을 놓지 않고 있는 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것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과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 그에 대한 추모는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많은 날들을 지새웠을 김잔디님에게 "목소리 내줘서 고맙습니다. 이 책을 내주어서 고맙습니다. 살아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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