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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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어둠의 속도>라는 제목은 너무 판타지스럽지 않은가?

어슐러 k. 르 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이 떠올랐다.

표지와 첫장을 넘기면서도 선입견은 달라지지 않았다. 5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고서야 이 책의 장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 그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언론에 등장하거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접했던 증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본인의 특정한 방식(패턴이나 수학적 방식)을 통해 지각한다. 정상인이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있다.

책의 제목에 대한 힌트는 책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장르에 대한 의심을 끝내 버리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어둠의 속도에 궁리하고 있었어." 22쪽

"어둠에는 속도가 없어." "그저 빛이 없는 곳일 뿐이지 - 부재에 붙인 명칭일 뿐이야." 130쪽

"어둠은 빛이 없는 곳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 - 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131쪽

내게는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빨리 일어나서 보이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 사건들이 인식에 앞서, 먼저 도달하기 때문에 빛보다 빠른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230쪽

그는 직장에서 컴퓨터를 활용한 업무를 하고, 펜싱을 배우고 대회에 나가기도 한다.

그가 마저리라는 여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하기도 하고,

책을 통해 정상인이 사고하는 방식이나 답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다음은 그가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책은 사람들이 생각해 낸 질문에 답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답하지 않았던 질문을 생각했다. 나는, 늘 아무도 한 적이 없으니 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했엇다. 그러나 어쩌면 다른 누구도 생각해 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둠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무지의 심해에 처음으로 닿은 빛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질문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332쪽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내 말이 사실이기를, 내가 내 진단명 이상이기를 바란다. 394쪽

"저는 하나님이 부여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이건 사고였다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이렇게 태어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부여하셨다면, 바꾸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409쪽

"나는 내가 더 오래 살고 싶은지 살고 싶지 않은지 알지 못해."

"만약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서, 그 상태로 더 오래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어? 나는 내가 더 오래 살고 싶은지 결정하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먼저 알고 싶어." 432쪽

그가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의학적 관점인지 세속적인 관점인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대한 판단기준인지는 모호하지만) '돈'의 계속되는 악의와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그는 '정상인'이라는 개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기준이 세워진 듯 하다.

편견을 깨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 준 책이다. 표지에 속았다.

이것은 내용이 주는 반전에 자신이 있는 출판사의 승부수였을까? 부디 의도를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결국 순전히 본인의 판단 하에 치료를 택한 '루'. 그 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자폐증'이라는 판에 박힌 클리셰를 벗어던지게 해 준 책.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다.

책의 본문 전에 쓰여있는 서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을 얼마남지 않은 올해의 책으로 혼자 정해본다.

읽길 잘 했어!!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인 의견이나 느낌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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