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들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누구든 자기가 잘 하는, 잘 하고픈 영역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 욕구는 가끔 너무도 강렬해서 타인의 것을 모방하고 싶어하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되어보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따라하다가 나중에는 넘어서고 싶어지는 그 이상한 심리.
성대모사로 인정받은 무명가수가 결국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싶다고 울부짖듯.
여기 글쟁이 모여 있는 공간이 있다. 때마다 찾아오는 합평 시간.
자신의 글의 첫번째 독자가 되어 줄 동료들 간에 흐르는 긴장감.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는 평생의 원동력이, 누군가에게는 끝모를 좌절감을 선사하는 그 곳. 그 시간.
한 없이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빌리'를 만났다.
천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빛이 나는 외모. 그에게 인정받았다는 느낌.
내가 '빌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감탄과 경이가 뒤섞여 있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듯.
그에게는 없고 나에게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아파트 한 채.
경제적인 문제로 이 곳을 떠나게 되면 그대로 끊어질 것 같은 인연을 이어가고자 나는 '빌리'를 룸메이트로 들인다.
월세 대신 청소. 높은 집값에 비례하지 않는 '빌리'의 기여도는 둘 간의 필연적인 불화를 예고했었다.
1996년. 나와 '빌리'의 몇 개월은 시너지를 발휘한 시간들이었다.
빌리의 친척 결혼식의 피로연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오해라고 칭하고 싶다. 끝내 그 오해를 풀어내진 못했지만.
1997년. 나와 '빌리'의 벌어진 틈을 끝내 메워지지 않는다.
그에게 올인했던 인간관계를 다른 학우들로 넓혀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와중에 평소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애덤이 유망한 잡지에 글을 게재한다.
'빌리'와 나는 공유했던 시간들을 점차 줄여간다. 마음 떠난 연인들이 그러하듯.
그리고 나의 결정적인 실수. 아니 내가 던진 폭탄.
결국 '빌리'와 '아파트' 전부를 잃게 된다.
'빌리'가 내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의 소식을 책의 저자 소개란을 통해 업데이트한다.
그의 글을 읽어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 속 어딘가에 등장했을 지도 모를 나. 혹은 그 사건 때문일까.
끝내 발표하지 못한 <교열팀장> 속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때 오해를 풀었다면 나와 '빌리'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가 욕심내지 않았다면. 그의 글을 교열하고 있을지도....
동경과 우정 그 어딘가에서 멈춰버린 인연.
<아파트먼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