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필요한 시절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규관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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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책 중에 손홍규 님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있다.

산문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읽으면서 뭔가 과거에 친숙했던 정서(아마도 '향수'가 아닐까)를 세련된 문장으로 접하는듯 했다.

단조롭고 싱거울 수 있는 산문인데,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이 무언가로 채워진 듯 농도 짙은 글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알라딘에서 진행했던 리뷰대회 참여하려고 읽었던 한지혜님의 산문집 "참 괜찮은 눈이 온다" 역시 고유서가에서 나온 책이었다. 성숙한 어른이 쓰는 글이 이렇겠구나 했었다. 이 책은 블로그에 리뷰도 남겼다.

문학이 필요한 시절.

내가 책을 찾을 때가 주로 언제인가.

한동안은 다신 책을 안 볼 사람처럼. 그 다음은 글을 못 읽어서 환장한 사람처럼.

어찌보면 주기적으로 이런 시기들이 반복되니 나름 규칙적인건가?싶다.

독자의 경우가 이럴진대, 작가의 경우는 어떨까...?

시인이 쓰는 산문은 결이 다른 것 같다.

이런 표현은 외워두고 언제고 사용하고 싶어진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론이 그리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그리고 우기고 싶지도 않다. 다만 어느 경험주의자가 세계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에 중얼거리는 혼잣말이라고 읽어주면 고맙겠다.

휴게소에 대한 명상 107쪽 중에서

신문기사를 읽을 때 가끔 홀로 중얼거릴때가 있다. 뭔가 불만족스러운데 그걸 또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거창하게 설명하기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이걸 또 인정할 수는 없고. 그런 상황에서 위의 문구는 그때의 내 감정(혹은 감상)을 온전하게 구현한 표현이다.

자. 여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뭐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자유니까).

'시적 언어'라는 것은 테크놀러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다. 일반화되고 납작해진 언어를 벗어던진 언어이고, 상투적인 유행어를 신경질적으로 배격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정파적 입장이나 정치 이념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각자의 몸에 새긴 언어이며, 그래서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미디어의 언어를 걷어내고 삶의 심장이 펄떡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언어이다.

속도의 언어와 시적 언어 218-219쪽

문학이 필요한 시간. 시적 언어. 삶의 심장이 펄떡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언어.

어떤 문장은 깊이를 알 수 없어 헤어나오기까지의 기간을 헤어리기 버겁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단단해야 할까.

음. 필사를 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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