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합치 - 예술과 실존의 근원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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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

내용에 대한 기시감이 아니라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는 의미에서의 기시감이다.

한병철 교수님 책(피로사회 등)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문장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고,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가고 "그래서, 내용이 뭔데?"라고 지인이 물어오면

대답을 하기엔 입을 열어 나오는 말들이 부끄럽다고 느껴지는 종류의 책.

그래서 좀 더 알고싶다, 더 알아겠단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

탈합치. 이거 혹시 '정반합'의 다른 의미인가?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책장을 넘긴다.

헤겔이 등장하고 그의 사상이 나오기는 하지만 좀 더 포괄적인 혹은 미시적인(?)

그래,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본질적인' 내용을 다룬다.

공부를 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점은 책의 구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차례를 보면 한국어판 서문 부터 9. 근대성까지의 분량이 135페이지 정도된다.

이어지는 '역자 해제·탈합치의 정치', '역자 후기' 부분의 분량이 68페이지 정도.

저자가 아닌 역자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정도로 많을 정도의 책이라니.

보통 6페이저 정도, 혹은 많아야 20페이지를 넘지 않았던 듯 한데. 이 정도라면 역자가 책에 대해 품고 있는 감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이해를 하려면 역자 정도의 애정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뷰어로서 챙피한 고백인데, 아직 내공이 이 책을 A4 용지 한 장 못되는 분량으로 축약할 엄두를 못내겠다.

이럴 경우는 보통 책의 내용 일부를 발췌해서 적기도 하는데, 사실 책에 줄을 그은 부분이 대부분이라 문장 고르는 것도 버겁다.

예전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을 읽었을 때가 떠오르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이 책의 대단함을 일부나마 기재하는 것으로 짧은 감상을 마친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이후로(그 책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문학작품의 내용을 빌려와서 예를 드는 경우가 많아진 듯 하다. 이 책에도 매 장마다 고전이 등장하고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무려 성경의 내용이 인용되기도 한다.

등장하는 작품들의 내용을 모름에도 아는 척 하고 싶게 만드니 지적 허영심을 너무 자극하는 부작용이 있다. 부디 이점 유의하시기를

확립과 동시에 고정되는 모든 질서를 내부에서 해체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원을 나타나게 하는 탈-봉인을 나는 탈-합치로 명명할 것이다.

서문 16쪽 중에서

오히려 산다는 것 자체가 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세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단절 없는 합치 속에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산다는 것의 정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3. 산다는 것은 탈-합치하는 것이다 41쪽 중에서

즉 자아와의 탈결속이 스스로 구성할, 그리고 탈합치가 사유하게 해주는 장점 안에서 자기의 정당성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탈합치는 끝도(목적도 종결도) 없는 것으로서 '지양'의 보증에 기댈 수도 없다.

6. 어떻게 부정적인 것이 실존을 활성화하는가 87쪽 중에서

그런데 탈합치가 해체하는 것이 바로 합치와 적합성의 확정성이다. 바로 이런 점에 탈합치는 자신의 힘을 빚지고 있다. 이 점에서 탈합치는 구원의 길을 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어떻게 부정적인 것이 실존을 활성화하는가 89쪽 중에서

*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개인적인 느낌과 주관적인 의견을 적은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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