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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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본 영화 중 '암수살인'이 떠오른다.

이미 복역 중인 전과자가 자신이 저질렀으나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을 자백하고 피해자들의 유해를 찾게 해주겠다면서 형사의 면회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이와 비슷하나 이 소설은 결을 달리한다.

어린 시절. 아마도 내가 지금보다는 더 빛이 났을 어린 시절.

지금의 '나'는 예전의 빛을 잃어버린 평범한 대학생이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법대에 진학했다는 것만 기억하는 과거의 '그 사람'으로부터 온 한통의 편지.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으나 그 중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9건에 대해서만 기소된 후 전부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그 사람.

마지막 1건에 대해서는 무고하다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달라는 그 사람.

아닌게 아니라 그 전 8건과 나머지 1건은 기존의 범행방식과 대상이 다름이 분명한데.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사건 기록에는 묘한 암시가 있다. 어머니가 찍힌 사진도 등장한다.

자신에게 냉담한 아버지, 집 안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어머니.

이상하게 자신에게 친근감을 보이는 그 사람.

나. 아무래도 그 사람의 핏줄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나. 그 사람과 같은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순간 암시에 끌려들어가고 있다.

복역 중임에도 자신이 점찍어두었던 희생양들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한 그 사람.

본색을 드러내기까지(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도무지 버리지 않은 그 집념.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조건은 유전인가. 혹은 환경인가 하는 해묵은 논란부터

'영아살인죄'와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공소시효', '유죄를 인정함에 있어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는 어느 정도까지인지'에 대해서까지 폭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었다.

재판 과정은 다루지 않는다. 현재 시점에서 법조인이 아닌 일반인(법대 재학생)이 재판 중인 사건의 일부에 대해 파헤치고 피고인의 태생부터 과거, 입양 이후의 삶에 대해서 파고들면서 범인의 암시에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거의 실시간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는 남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범함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 아니면 깨지 않는 환상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이 나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사람의 이런 성향을 파고들어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사람'의 선택임에도 본인 스스로의 의지라 믿게 만들어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런 때. 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인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 희생양이 될 뻔한 아이들의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이 사람의 범행은 아직 진행 중임을 깨닫게 된다.

에이치에서 '온'에 이어 펴낸 신간 '사형에 이르는 병'.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로 거듭난 것을 축하드린다.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섬뜩하고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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