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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ight in Persia
한지훈 지음 / 스테레오마인드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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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이 아니라 아찔한 순간을 수없이 넘기며 예기치 못한 경험을 들려주는 여행기. 네이버 블로그에서 유명한 오디오 전문가(페북은 친구가 아니라서 잘 모름)인데, 이 분의 글을 읽다보면 박사까지 졸업한 전산쟁이 경력에 걸맞게 완벽주의자. 섬세하고 생생한 상황표현, 특유의 욕쟁이 아재 문장을 깨알처럼 뿌려놓았다. 사진은 또 생동감이 넘치고 구도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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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보감
홍만표 지음 / 책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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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인터넷을 달군,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주제를 쉽게 풀고, 경험에 기반하여 쓴 글. 단숨에 읽었는데...실천은 쉽지 않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올해로 5년째 직장생활 하고 있는 딸내미에게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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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fect Mile: Three Athletes, One Goal, and Less Than Four Minutes to Achieve It (Paperback)
Bascomb, Neal / Mariner Books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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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 인간이 1마일을 4분안에 못 달린 것이, 4분을 돌파하면 심장이 터질 것이라는 둥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인다. 굳이 비중을 따진다면 인간의 한계라고 언론, 선험자 등이 설레발 친 것은 많아야 20-30%. 달리는 기술과 환경(신발, 운동복, 트랙 등등)이 보급내지 공유되지 않았다는 데 30-40%, 달리는 데 동기가 부족(프로화...즉, 달리는 선수들에게 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순수한 아마튜어리즘이 지배하는 시절이었다) 했다는 데 50% 이상이라고 보고싶다. 로저라는 사람이 이 기록을 깬 이후에 봇물처럼 4분대 벽을 깬 사람이 쏟아진 이유는 위의 조건들이 그 시점을 구분하여 모두 전환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195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는 1마일경기(1.609km)가 아주 유행하고 있었으며, 기록경기의 특성상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 위하여 젊은이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의대생이던 로저 베니스터, 호주의 농과대학생 존 랜디, 미국의 대학생 웨스 산티, 이들 세명이 비슷한 또래의 나이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다. 그 때만 해도 1마일의 기록은 4분 10여초 정도면 우승권이었다. 어떤 육상전문가가 1935년에 말하길 '아주 빨라야 4분 1초5'라고 선언했고, 1953년까지 그 기록을 깬 사람은 1사람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4분벽을 깨기 위하여 각자 각고의 노력을 한다. 셋은 나란히 1952년 핀란드의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나 모두 불운 내지는 현지 적응 실패로 메달을 따지 못하고 큰 실망을 안고 귀국해서는 우연찮게 1마일 4분돌파를 목표로 삼게된다.

 

로저는 의대생답게 생리학적인 분석과 실험을 통하여 자신의 체형과 체력 등등을 고려하여 훈련방법을 고안한다. 혼자서는 도저히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친구와 후배를 페이스 메이커로 투입하여 마침내 처음으로 4분벽을 깬다. 그러나 그건 '그들만의 리그'였다. 즉, 어떤 선수권대회가 아니라 기록을 깨기 위한 장소에서 순전히 우군들만 뛴 경주에서 기록을 깼다는 데 언론들이 시비를 건다.

 

존 랜디는 농과대학생으로서 역시 죽어라고 공부하면서 달리기를 한다. 상대적으로 호주는 달리기를 하는 여건이 아주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토펙을 우연히 만나서 그의 주법과 훈련방법을 전수받고는 나름의 훈련을 고안, 부지런히 연습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탱크처럼 체력으로 밀어붙이는 형. 호주의 환경을 벗어나서 핀란드로 원정, 페이스 메이커도 구해서 달린 결과 마침내 3분58초의 기록으로 로저 등 경쟁자들을 앞서게되었다. 

 

웨스 산티는 무지막지한 농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어 무지막지하게 달리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달리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캔자스대학 육상부에 입문한다. 당시 캔자스대학 육상부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던 거 같다. 거기서도 4년간 수십번의 팀 우승을 주도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1마일 내지 1,500미터 경주에는 팀 차원으로 진행하는 단체전에 희생되거나 갑작스런 주최측의 농간으로 제대로 뛰어보질 못한다. 최고 기록은 4분0초6...이와 유사한 기록을 서너번 기록한다. 운도 지지리도 없어서, 얘가 맘 먹고 뛸 때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거나. 집안 형편 내지는 육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징집을 미루다가 전성기에 ROTC로 입대하게 된다. 그 와중에 대회 참가시 규정 이상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선수자격을 박탈당한다. 육상연맹 간부들과 사이가 좋지않아 표적으로 당한 것이다. 벌써 그 당시에 육상은 최고인기 종목이었고, 산티는 인기 스타였으며 다른 참가선수들도 공공연히 규정이상의 보조금을 받았는데 유독 이 선수만 매장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조직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수천명이 있는데, 얘만 당하는가...달리기 재능은 얘도 다른 두 선수 못지 않은 것 같은데.

 

마침내 1954년 영연방 체육대회(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등이 참가)에 로저와 존이 참가한다. 산티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이 대회 결승경기의 해설자로 나서게 되었다. 대회 최고의 관심은 당연 1마일 경기였고, 존은 결승전 이틀 전에 깨진 전구에 발등을 크게 찔려서 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존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신문사도 끝내 보도하지 않았다. 결승전에서 둘은 빼어난 실력으로 다른 사람들은 압도하면서 경기를 했는데 로저가 승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사람이 동시에 4분벽을 돌파한 것이다. 존은 기자들을 상대로 인터뷰하면서 크게 다쳣음에도 불구하고, '발은 조금 다쳤으나 정상이었고, 조금도 다치지 않았더라도 그 이상의 기록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몸상태는 최고였다'라고 한다.

 

1마일 경주 최고의 기록은 1980년대 초반에 영국의 스티브 오베트와 세바스찬 코 라는 두 사람이, 2년 넘게, 25번이나 최고 기록을 주거니 받거니 갱신한 결과 1981년 3분47초33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이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앙숙이기도 했거니와 대단한 경기력으로 다시 한 번 1마일 또는 1,500미터 경주에서 스포츠계의 주목을 한꺼번에 받았다. 나도 아직 두 사람 이름은 기억한다. 그 다음으로는 1999년 아프리카 출신의 뛰어난 야생마 같은 선수들이 등장, 질주하면서 그 중 모로코의 히참 엘 구에로가 3분43초13을 기록했단다. 그러니 '1마일 달리기의 속도 한계가 얼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형편.

 

인상적인 장면은 이들 셋이 모두 달리기는 취미로 한 것이다. 즉, 낮에는 죽어라고 공부하고(각각 의학, 정치학, 농학), 남는 여가 시간에 달리기를 했다. 특히 로저는 전형적인 영국 귀족의 자태가 난다. 신기록을 내거나 경쟁자를 이겨도 겸손, 크게 내색하지 않고 그래서 영국 국민들이 매우 좋아했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학창시절이 끝나자 곧바로 육상도 끝내고는 본연의 직업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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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박지원 참 우리 고전 1
박종채 지음 / 돌베개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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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람들 중에 이런 양반이 있을까?

천재로 태어나서 조선시대(영조, 정조, 순조 때)에 살던 사람이라 정치, 행정, 문화(글, 글씨, 그림) 등등에 두루 능하고 처세 또한 째째하지 않아서 아웃사이더들에게 특히 많은 지지가 있었고, 품행이 방정하여 임금들도 더러 찾아서 비문이라든지 빼어난 필력이 필요할 땐 부탁을 했다.

실학파들과 가깝게 지냈고, 거치장스런 절차를 몹시도 싫어했다만 그 것도 유교의 범위 내에서였다는 게 한계...그렇지 않았다면 미친 놈 소리를 들었겠지.

 

아쉽다면...이런 천재가 세상이 더러워서 잽만 날리고 본격적으로 흙탕물에 뛰어들어 시비를 가리고 큰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거.

조선시대에 자기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적으면서 못난 점을 감히 기술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니 그 한계는 인정.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목이 더러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첨부터 끝까지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박씨 개인적으로 보면 졸나 멋지고 도도하게 살다 간 거 같다. 풍채도 대단하고 우렁찬 목소리, '한끼에 한 말 밥과 세접시의 고기를 먹으면서 세상을 씹기'도 했단다. 

 

민원을 시원하게 처리했다고 하지만 군수(면천, 양양, 함안) 정도의 , 그리고 5품(요새 치면 5급 사무관이나 4급 서기관 정도?)이었다면 그리 중요한 일을 조처하지 않았으니 행정가로서 크게 평가해줘야 될 지는 모르겠다.

 

역시 북학파의 지존답게 그 사상에는 자본주의적 싹이 보이기도 한다. 나라에 흉년이 있어서 곡물을 강제로 징발하자는 의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감히 임금께 의견을 개진했다. 시장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 독점의 폐해 등을 명확히 깨닫고 있다.

"온 나라 사람 가운데 임금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거늘 만일 온 지방의 곡물을 모두 서울에만 모아놓고 그것이 지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면, 장차 지방의 백성들은 내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런가 하면 이런 의견도 개진하셨다. "상인은 관에서 조종해서는 안됩니다. 조정하면 물건값이 고정되고, 물건값이 고정되면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면 가격을 조절하는 시장 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궁해지고 백성들은 살아갈 바탕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싼 곳의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다 파는 행위는 실로 넘치는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데다 보태주는 이치인 것입니. 이는 비유컨대 흐르는 물 밑의 가벼운 모래가 출렁거리는 물결에 고루 퍼져 솟은 곳도 패인 곳도 없게 됨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삶도 아주 청빈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아랫사람들에게는 모두 살 방도를 알려주었다.  

군수로서 편 행정이지만 교과서 그대로였던 거 같다. 즉, 행정공무원이 없는 것처럼 일을 했다는 것이다. 가고 나니 백성들이 아쉬워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백성을 다스릴 때 자잘한 사정을 베풀지 않고 오직 근본에 힘쓰셨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음과 앞날을 헤아려 대비함에 주력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수령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수령이란 원래부터 그런 것인 줄 알았으며, 선정이 어떤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만두고 떠나게 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 10여 명이 동구 밖까지 따라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모르고 있사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할 것이옵니다."

 

세상이 잘못 굴러가는 건 다음에 연유한단다.

 "인순고식, 구차미봉"(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적당히 임시변통으로 땜질하는 태도를 뜻하는 말)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그리고 박지원의 친구 중에 또한 멋진 분이 있었던 거 같다.

유상국(유언호)의 훌륭함을 이렇게 칭찬하셨다.

 "언젠가 큰 눈이 내린 날이다. 사경(유언호의 자, 친밀한 사이에는 자로 부른다)이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당시 정승이 된 지 이미 오래였건만 방 안에는 바람을 막는 병풍 하나 없더구나. 홑이불이라고 있는 건 해어졌고, 자리 곁에는 몇 권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옛날 안성에서 포의로 지낼 때와 똑같더구나. 자주 술을 데워오게 했지만 다른 안주라곤 없고 손과 주인 앞에는 이가 빠지고 투박한 큰 사발에 가득 담은 만두 100여 개뿐이었다. 이 샐 무렵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의 폐단을 없애는 방안이었는데, 이야기 도중 문득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기도 하였다

 

묘자리를 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말했다. 요새도 이런 사람이 많으니 그 때는 오죽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찰력이 있음은 대단한 분이라 하겠다.

 "세상 사람들은 풍수에 많이 미혹된다. 나는 편안하거나 길한 땅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묘지를 구하는 사람들이 매양 자기 자신의 화복을 먼저 따지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일을 할 때 화를 두려워하고 복에 유혹된다면 이는 사사로운 뜻이 개재된 것이다. 사사로운 뜻이 개재되면 미혹하게 되나니, 미혹되면서 일을 그르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더군다나 아득하고 막연하여 증명할 수 없는 일에 있어서이랴. 자기 자신의 복을 위해 길지를 얻고자 한다면 천하를 다 돌아다니더라도 필시 얻지 못하리라. 산과 들에 조상의 뼈를 갖고 다니며 큰 복을 구하는 짓을 어찌 한단 말인가. 하늘이 반드시 미워

할텐데 복을 받을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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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김동열 옮김 / 좋은씨앗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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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관심사 내지 사명감을 뒤로 쳐두고라도 2대에 걸쳐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목숨을 담보로 미개한 나라에 몸을 던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전혀 두려움없이,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나가는 모습은 참 감동스럽다. 뭐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쪽팔린 행동이나 생각은 기술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1890년 홀의 아빠가 의료선교사로서 아내(역시 의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다음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아빠는 한국에서 병으로 요절한 다음 아들이 미국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고 또 의사인 아내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는 1940년 일제에 의하여 추방되기 까지 회고한 글이다. 1940년에도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곧바로 인도로 가서 20여년간 의료선교활동을 한 걸 보면 대단한 깡다구의 소유자다. 1988년에 이 아저씨가 91세 되던 해에 한국에서 이 분의 공적을 알고는 한국으로 초청을 했는데, 이 양반이 입고 나갈 외출복이 없었단다. 아지매도 마찬가지. 그래서 양복은 캐나다에 있는 한국인 독지가들이 마련해주고, 아지매 옷은 부유한 친구들의 것을 얻어입고 한국을 방문했단다. 그리고는 1991년 98세에 돌아가시고, 아지매는 5개월 후 95세에 돌아가셨단다. 물론 죽은 곳은 고향인 캐나다에서 죽었는데 화장한 다음 한국의 양화진에 묻었단다. 거기에는 아빠, 엄마, 아들, 누나, 마누라, 딸도 함께 묻혀있다는 걸 보면 한국에 대하여 참 대단한 애정을 가진 거 같다. 이 장면에서는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의사라면 어딜 가든 부자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인류에 헌신하고 가난하지만 당당하게 사는 모습은 참 멋지다.

 

몇몇 인상적인 부분만 추려보면

- 1890년에 아빠가 처음 선교사로 부산에(물론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18일이 걸려서) 도착했는데,

  . '언덕과 산들이 매우 가파르고 암석이 많고 나무가 없어 삭막해보였다'...아마도 땔감이 없어서 모든 나무들을 부엌 아가리로 보낸, 가련한 삶을 살고 있을 때가 아닌가.

  . 일본인, 중국인보다는 키가 월등히 크다. 모자를 장신구로 쓰고 그 종류도 엄청나게 많다. 선비, 고관들은 모두 부채를 들고 다닌다. 여름, 겨울 구분없이.

- 이 때만 해도 사과가 국내에는 없었다.1892-1932년에 선교사로 한국에 재직한 스웰런이란 분이 도입했다.

- 불교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서민은 잡신을 숭배, 양반들은 유교를 숭배...이 아저씨가 잘못 파악한 거 같다. 대부분이 잡신 아니었나 싶다. 요즈음도 뭐, 한꺼풀만 벗기면 '祈福' 아닐까.

- 평양은 그 모양이나 풍수지리설에서 '떠나가는 배'모양이라, 성중에 우물이 없단다.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아서 도시가 가라앉는다고 해서.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북청물장수라는 산업도 생긴거라.

- 서양의 천년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그만큼 후진 모습이었다.

- 아직도 도심에 호랑이가 출몰한다.

- 조선사람들은 대부분 시계없이 살고 있다. 조선에선는 사람들의 긴박감과 시간개념을 배울 수 없었다. 조선인들의 생활철학은 서두르지 않는 태평함에 있다.

- 조선의 영문표시는 'CHO-SEN'이다.... 아마도 1800년대 말부터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이 자기들 부르기 쉽게 이렇게 표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조센징'이 되었을 거 같다.

- (선교사들의 눈으로 볼 때)가장 아름다운 곳이 소래포구와 원산의 해변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조선의 풍경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금강산도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침 해돋이도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달리 너무 장엄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걸 해돋이를 보면서 느꼈다.

- 가장 참기 어려운 거 중의 하나가 무당이 밤세워 굿하는 소리, 그 중에서도 찢어지는 듯한 징소리와 북소리이다.

- 조선인들의 믿음은 산이라도 움직일 듯 굳건하다. 이들은 밤을 세워서 기도하고, 큰 소리로 하기를 좋아한다....요새도 마찬가지.

- 크리스마스 실은 덴마크에서 시작했다. 어떤 시골마을의 폐결핵 환자 촌에 운영비가 부족한 걸 그 동네의 우체국 직원이 우표를 작은 값에 사는 것을 보고 십시일반으로 크리스마스 때 실도 함께 팔아서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거 같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고, 성공적이서 덴마크는 폐결핵인구가 당시 세계 최저였다. 홀이란 분이 이걸 한국에 처음 적용했다.

- 크리스마스 실과 관련한 압권...이 사업을 시행한 첫 해에 여러 사람, 조직으로부터 다양한 편지가 왔는데 대부분은 좋은 행사다. 앞으로도 계속 지원하겠다 등등이었는데, 그 중의 한 편지에는.......

   '.....저는 당신이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광고를 보고 실을 샀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이 실을 정성껏 가슴에 붙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약은 나의 심한 기침을 조금도 낫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돈을 돌려주시기를 청구합니다'.

...................

   '...여러 사람들 입에 자자한 그 훌륭한 크리스마스 실 약을 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값은 얼마라도 지불하겠습니다...'

  ...'당신의 요양원에 무료 입원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실 입원권을 좀 보내주십시오. 저의 친구들도 많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 조선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어떤 아줌마가 아팠는데, 의사를 3명을 고용해서 치료하는 중에 또 이 양반에게도 치료를 해달라고 해서 격분했다....요즈음 말하는 '의료쇼핑'이 그 때도 있었다고나 할까. 

-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면서 단파라디오는 모두 압수해갔다. 그래서 이 양반은 의사가 가지고 있는 청진기를 활용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장파라디오의 스피커 부분에 청진기를 대고 튜너를 조심스레 돌려 봤다. 그랬더니 단파 방송 중의 하나가 잘 들렸다. 그래서 외국에서 보내는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

- 인도를 기행하면서, '정적의 탑'이란 곳을 방문하였는데 Parsee교도들이 사람의 시체를 독수리가 뜯어먹게 하는 것을 봤다...鳥葬이라고도 하고 天葬이라고도 한다....그 신자 중의 한사람에게 물었더니, 왈, '새에게 먹히는 것 보다 벌레에게 시체를 먹히게 하는 것이 더 몸서리쳐지는 것'이라고 했다...같은 행동(장례)에 대하여 사람의 생각에 따라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나 싶다.

 

 

참 부러운 것이 보였는데, 뭐냐하면 미국 내지 캐나다의 사회 시스템이란 것이다. 선교활동과 생물학자 등을 중심으로 식자층들이 제3세계로 진출하는 이면에는 다양한 관점의 정보를 본국에 전한다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 종교단체에서 선교자금을 받다가 자기가 벌인 사업을 수행하기에 예산이 부족하면 주저없이 본국의 친구들, 교회, 자선단체에 사업계획서와 자신이 이룬 성과 등등을 보내면 이들은 믿고 지원을 해준다는 것.

- 안식년이라는 걸 철저히 준수하여 충전의 기회를 갖고(쉬기도 하지만 새로운 전문지식을 더 쌓는 기회로 여기는 것 같음), 자신의 사업을 널리 이해시키고(교회 등지에서 설교하는 시간을 배려), 자금도 모으는 기회도 가지며,

- 안식년을 통하여 특정한 사람에 의하여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하여 조직이 운영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즉, 안식년으로 이 사람이 자리를 비우게 되니 반드시 대타를 마련해서 그 조직을 맡긴다).

- 많은 여행을 통해서 식견을 넓힌다. 서울에 부임, 안식년(2차례)을 가지려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는 행로를 만주와 러시아를 관통하는 경로, 유럽과 인도, 싱가폴 등지를 통하는 경로를 선택하여 1달 내외 기간 동안 여행하면서 통과하는 나라를 방문한다.

- 이상은 미국인들이 100년전에도 하던 생활방식인데 우리나라의 살림살이도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애들을 키우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학원, 과외, 경쟁...불신지옥 예수천국... 생각할 바가 많다. 물론 사회적으로 제동장치가 있는 그들 나라와, 내가 무너지면 가족이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사회와는 분명 많은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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