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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박지원 ㅣ 참 우리 고전 1
박종채 지음 / 돌베개 / 1998년 9월
평점 :
요새 사람들 중에 이런 양반이 있을까?
천재로 태어나서 조선시대(영조, 정조, 순조 때)에 살던 사람이라 정치, 행정, 문화(글, 글씨, 그림) 등등에 두루 능하고 처세 또한 째째하지 않아서 아웃사이더들에게 특히 많은 지지가 있었고, 품행이 방정하여 임금들도 더러 찾아서 비문이라든지 빼어난 필력이 필요할 땐 부탁을 했다.
실학파들과 가깝게 지냈고, 거치장스런 절차를 몹시도 싫어했다만 그 것도 유교의 범위 내에서였다는 게 한계...그렇지 않았다면 미친 놈 소리를 들었겠지.
아쉽다면...이런 천재가 세상이 더러워서 잽만 날리고 본격적으로 흙탕물에 뛰어들어 시비를 가리고 큰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거.
조선시대에 자기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적으면서 못난 점을 감히 기술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니 그 한계는 인정.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목이 더러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첨부터 끝까지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박씨 개인적으로 보면 졸나 멋지고 도도하게 살다 간 거 같다. 풍채도 대단하고 우렁찬 목소리, '한끼에 한 말 밥과 세접시의 고기를 먹으면서 세상을 씹기'도 했단다.
민원을 시원하게 처리했다고 하지만 군수(면천, 양양, 함안) 정도의 , 그리고 5품(요새 치면 5급 사무관이나 4급 서기관 정도?)이었다면 그리 중요한 일을 조처하지 않았으니 행정가로서 크게 평가해줘야 될 지는 모르겠다.
역시 북학파의 지존답게 그 사상에는 자본주의적 싹이 보이기도 한다. 나라에 흉년이 있어서 곡물을 강제로 징발하자는 의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감히 임금께 의견을 개진했다. 시장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 독점의 폐해 등을 명확히 깨닫고 있다.
"온 나라 사람 가운데 임금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거늘 만일 온 지방의 곡물을 모두 서울에만 모아놓고 그것이 지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면, 장차 지방의 백성들은 내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런가 하면 이런 의견도 개진하셨다. "상인은 관에서 조종해서는 안됩니다. 조정하면 물건값이 고정되고, 물건값이 고정되면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면 가격을 조절하는 시장 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궁해지고 백성들은 살아갈 바탕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싼 곳의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다 파는 행위는 실로 넘치는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데다 보태주는 이치인 것입니다. 이는 비유컨대 흐르는 물 밑의 가벼운 모래가 출렁거리는 물결에 고루 퍼져 솟은 곳도 패인 곳도 없게 됨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삶도 아주 청빈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아랫사람들에게는 모두 살 방도를 알려주었다.
군수로서 편 행정이지만 교과서 그대로였던 거 같다. 즉, 행정공무원이 없는 것처럼 일을 했다는 것이다. 가고 나니 백성들이 아쉬워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백성을 다스릴 때 자잘한 사정을 베풀지 않고 오직 근본에 힘쓰셨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음과 앞날을 헤아려 대비함에 주력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수령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수령이란 원래부터 그런 것인 줄 알았으며, 선정이 어떤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만두고 떠나게 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 10여 명이 동구 밖까지 따라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모르고 있사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할 것이옵니다."
세상이 잘못 굴러가는 건 다음에 연유한단다.
"인순고식, 구차미봉"(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적당히 임시변통으로 땜질하는 태도를 뜻하는 말)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그리고 박지원의 친구 중에 또한 멋진 분이 있었던 거 같다.
유상국(유언호)의 훌륭함을 이렇게 칭찬하셨다.
"언젠가 큰 눈이 내린 날이다. 사경(유언호의 자, 친밀한 사이에는 자로 부른다)이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당시 정승이 된 지 이미 오래였건만 방 안에는 바람을 막는 병풍 하나 없더구나. 홑이불이라고 있는 건 해어졌고, 자리 곁에는 몇 권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옛날 안성에서 포의로 지낼 때와 똑같더구나. 자주 술을 데워오게 했지만 다른 안주라곤 없고 손과 주인 앞에는 이가 빠지고 투박한 큰 사발에 가득 담은 만두 100여 개뿐이었다. 날이 샐 무렵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의 폐단을 없애는 방안이었는데, 이야기 도중 문득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기도 하였다
묘자리를 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말했다. 요새도 이런 사람이 많으니 그 때는 오죽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찰력이 있음은 대단한 분이라 하겠다.
"세상 사람들은 풍수에 많이 미혹된다. 나는 편안하거나 길한 땅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묘지를 구하는 사람들이 매양 자기 자신의 화복을 먼저 따지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일을 할 때 화를 두려워하고 복에 유혹된다면 이는 사사로운 뜻이 개재된 것이다. 사사로운 뜻이 개재되면 미혹하게 되나니, 미혹되면서 일을 그르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더군다나 아득하고 막연하여 증명할 수 없는 일에 있어서이랴. 자기 자신의 복을 위해 길지를 얻고자 한다면 천하를 다 돌아다니더라도 필시 얻지 못하리라. 산과 들에 조상의 뼈를 갖고 다니며 큰 복을 구하는 짓을 어찌 한단 말인가. 하늘이 반드시 미워
할텐데 복을 받을 리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