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rfect Mile: Three Athletes, One Goal, and Less Than Four Minutes to Achieve It (Paperback)
Bascomb, Neal / Mariner Books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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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 인간이 1마일을 4분안에 못 달린 것이, 4분을 돌파하면 심장이 터질 것이라는 둥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인다. 굳이 비중을 따진다면 인간의 한계라고 언론, 선험자 등이 설레발 친 것은 많아야 20-30%. 달리는 기술과 환경(신발, 운동복, 트랙 등등)이 보급내지 공유되지 않았다는 데 30-40%, 달리는 데 동기가 부족(프로화...즉, 달리는 선수들에게 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순수한 아마튜어리즘이 지배하는 시절이었다) 했다는 데 50% 이상이라고 보고싶다. 로저라는 사람이 이 기록을 깬 이후에 봇물처럼 4분대 벽을 깬 사람이 쏟아진 이유는 위의 조건들이 그 시점을 구분하여 모두 전환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195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는 1마일경기(1.609km)가 아주 유행하고 있었으며, 기록경기의 특성상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 위하여 젊은이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의대생이던 로저 베니스터, 호주의 농과대학생 존 랜디, 미국의 대학생 웨스 산티, 이들 세명이 비슷한 또래의 나이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다. 그 때만 해도 1마일의 기록은 4분 10여초 정도면 우승권이었다. 어떤 육상전문가가 1935년에 말하길 '아주 빨라야 4분 1초5'라고 선언했고, 1953년까지 그 기록을 깬 사람은 1사람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4분벽을 깨기 위하여 각자 각고의 노력을 한다. 셋은 나란히 1952년 핀란드의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나 모두 불운 내지는 현지 적응 실패로 메달을 따지 못하고 큰 실망을 안고 귀국해서는 우연찮게 1마일 4분돌파를 목표로 삼게된다.

 

로저는 의대생답게 생리학적인 분석과 실험을 통하여 자신의 체형과 체력 등등을 고려하여 훈련방법을 고안한다. 혼자서는 도저히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친구와 후배를 페이스 메이커로 투입하여 마침내 처음으로 4분벽을 깬다. 그러나 그건 '그들만의 리그'였다. 즉, 어떤 선수권대회가 아니라 기록을 깨기 위한 장소에서 순전히 우군들만 뛴 경주에서 기록을 깼다는 데 언론들이 시비를 건다.

 

존 랜디는 농과대학생으로서 역시 죽어라고 공부하면서 달리기를 한다. 상대적으로 호주는 달리기를 하는 여건이 아주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토펙을 우연히 만나서 그의 주법과 훈련방법을 전수받고는 나름의 훈련을 고안, 부지런히 연습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탱크처럼 체력으로 밀어붙이는 형. 호주의 환경을 벗어나서 핀란드로 원정, 페이스 메이커도 구해서 달린 결과 마침내 3분58초의 기록으로 로저 등 경쟁자들을 앞서게되었다. 

 

웨스 산티는 무지막지한 농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어 무지막지하게 달리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달리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캔자스대학 육상부에 입문한다. 당시 캔자스대학 육상부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던 거 같다. 거기서도 4년간 수십번의 팀 우승을 주도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1마일 내지 1,500미터 경주에는 팀 차원으로 진행하는 단체전에 희생되거나 갑작스런 주최측의 농간으로 제대로 뛰어보질 못한다. 최고 기록은 4분0초6...이와 유사한 기록을 서너번 기록한다. 운도 지지리도 없어서, 얘가 맘 먹고 뛸 때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거나. 집안 형편 내지는 육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징집을 미루다가 전성기에 ROTC로 입대하게 된다. 그 와중에 대회 참가시 규정 이상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선수자격을 박탈당한다. 육상연맹 간부들과 사이가 좋지않아 표적으로 당한 것이다. 벌써 그 당시에 육상은 최고인기 종목이었고, 산티는 인기 스타였으며 다른 참가선수들도 공공연히 규정이상의 보조금을 받았는데 유독 이 선수만 매장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조직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수천명이 있는데, 얘만 당하는가...달리기 재능은 얘도 다른 두 선수 못지 않은 것 같은데.

 

마침내 1954년 영연방 체육대회(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등이 참가)에 로저와 존이 참가한다. 산티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이 대회 결승경기의 해설자로 나서게 되었다. 대회 최고의 관심은 당연 1마일 경기였고, 존은 결승전 이틀 전에 깨진 전구에 발등을 크게 찔려서 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존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신문사도 끝내 보도하지 않았다. 결승전에서 둘은 빼어난 실력으로 다른 사람들은 압도하면서 경기를 했는데 로저가 승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사람이 동시에 4분벽을 돌파한 것이다. 존은 기자들을 상대로 인터뷰하면서 크게 다쳣음에도 불구하고, '발은 조금 다쳤으나 정상이었고, 조금도 다치지 않았더라도 그 이상의 기록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몸상태는 최고였다'라고 한다.

 

1마일 경주 최고의 기록은 1980년대 초반에 영국의 스티브 오베트와 세바스찬 코 라는 두 사람이, 2년 넘게, 25번이나 최고 기록을 주거니 받거니 갱신한 결과 1981년 3분47초33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이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앙숙이기도 했거니와 대단한 경기력으로 다시 한 번 1마일 또는 1,500미터 경주에서 스포츠계의 주목을 한꺼번에 받았다. 나도 아직 두 사람 이름은 기억한다. 그 다음으로는 1999년 아프리카 출신의 뛰어난 야생마 같은 선수들이 등장, 질주하면서 그 중 모로코의 히참 엘 구에로가 3분43초13을 기록했단다. 그러니 '1마일 달리기의 속도 한계가 얼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형편.

 

인상적인 장면은 이들 셋이 모두 달리기는 취미로 한 것이다. 즉, 낮에는 죽어라고 공부하고(각각 의학, 정치학, 농학), 남는 여가 시간에 달리기를 했다. 특히 로저는 전형적인 영국 귀족의 자태가 난다. 신기록을 내거나 경쟁자를 이겨도 겸손, 크게 내색하지 않고 그래서 영국 국민들이 매우 좋아했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학창시절이 끝나자 곧바로 육상도 끝내고는 본연의 직업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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