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 The housemaid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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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가진 것 없는 여주인공,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 질투의 화신인 악녀... 이 구도는 예전부터 굉장히 흔했다. 사랑, 증오, 질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거니와 그러한 구도가 흥미진진해서 흥행의 보증 수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녀'는 단지 갈등 구조를 재미있게 그려 흥행을 노린 작품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에 길들여진 천박함은  어디까지인가 탐구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원초적 감정만을 담아낸 게 아니라 사회비판적 코드도 반씩 있기 때문에 순수한 예술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첫 장면은 한 여자가 유흥가 한복판에서 뛰어내린다. 왜 그녀는 자살을 택해야만 했을까? 우리가 즐기고 잡담하는 시간에도 분명 누군가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너무나 슬프고 괴로워서, 또 사회가 만들어낸 모순에 숨이 막혀 그랬을 것이다. 

 이 작품은 분위기가 내내 어둡다. 감독의 의도대로 인간 본성과 현대 사회구조의 추악함을 나타내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오락거리 하나 없는 칙칙한 영화'라고 혹평할 수는 없다. 현대 철학자 아도르노는 어두운 부분, 추악한 부분까지 조명하는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고 반성적 미메시스(모방)을 가능하게 하여 인류의 진정한 발전을 이룬다고 하였다. '예술 작품'의 맥락에서 본다면 '하녀'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사랑, 증오, 질투 - 이 3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고 하늘의 뜻인데 이것들을 글(논리)로 풀어낸다는 행위는 어리석기 그지없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나온 '사랑'은 무엇인가? 친밀감도 헌신도 없는 한 순간에 빠져드는 정열뿐인 사랑인가? 은과 훈의 관계는 그럴 것이다. 두 사람은 사회적 신분 차이 때문에 친밀감이 형성될 수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한다는 병식과는 달리 '저 이 짓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은이는 정말 훈에게 헌신했을까? 그녀가 뱃속의 아이에게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도 기본적으로는 훈에 대한 헌신과 희생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집착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마치 안주인 해라처럼 말이다. 해라는 집착이 대단히 강하다. 아이 셋도 모자라 넷째, 다섯째까지 낳는다는 것은 훈을 향한 집착일 것이다. 그렇다. 해라는 소유욕에 있어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었고, 결혼해서도 마찬가지다. 훈을 진정 사랑해서가 아니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훈의 아이를 낳고, 남편을 빼앗아간 은이를 죽이려 드는 무서운 여자다. 어쩌면 그리스 신화의 '헤라'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질투심이 매우 강한 올림푸스의 안주인으로 제우스와 바람을 피운 여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그래서 이름도 비슷하게 지었을 것이다).

 은이를 불행에 몰아넣은 사람은 훈인데, 먼저 잘못을 저질러놓고 후에 은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치졸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바람피우는 남자들의 교활하고도 흐트러진 모습이랄까? 사회 구조가 만들어놓은 인간의 소유욕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병식은 젊을 때부터 하녀를 시작했지만 노인이 되어서까지 하녀로서 일한다. 병식이 어리석어서 그랬을수도 있지만 딱히 할 줄 아는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이 노력한다 한들, 사회 구조에서 탈출하기는 매우 어렵다. 병식은 사회적 약자로서, 현실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이었다. 저택은 권력과 거짓으로 점철된 사회 구조의 축소판이다. 동료가 희생되자 그동안 발휘하지 못했던 용기를 발휘하는 병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고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벗어나기도 힘들거니와 벗어난다고 해서 앞날은 커녕 당장이 보장받기도 어렵다. 그렇게 인간은 용기가 없어서, 제도에 중독되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진정한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실험을 해야 하며, 오직 절망만이 인류를 구원한다' 하였다.

 이 작품에서 먼저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원초적 감정인가 사회적 모순인가? 감독은 예술 영화를 의도했지만 사회비판 작품으로 남을 여지도 없지 않다. 은이처럼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에 대한 옹호 혹은 비판은 나중 문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은이의 감정이며, 세 사람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다.

 현실 비판 인물로 남았던 병식과는 달리 은이는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다. 저택 가족들에 대한 대항도 계급을 떠나 개인 행복 침해에 대한 대항이었다. 그런 은이에게 나미는 가장 좋은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나미 역시 나이가 들면 더러운 권력자가 될 지도 모르지만 나미에게만은 늘 좋은 것만 주고 싶은 훈과 해라의 마음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하녀'는 분명 투쟁하자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현실의 제도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부분까지 드러내는지, 또한 때묻지 않은 인간을 통하여 기본적 감정을 저택이란 사회의 축소판에서 마음껏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직 예술 영화에 익숙치 않아 해석이 어려웠지만 해석보단 '감상'에 충실해야 한다. 하녀를 통하여 우리 안의 마성, 사회의 명암을 다시금 비추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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