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개봉한 국내에 몇 안 되는 예술영화고, 그것도 예술의 한 분야인 '시'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더욱 예술 작품의 색이 짙은 영화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외손자와 단 둘이 사는 한 노인이 시 강좌를 수강하면서부터 자신에게 일어나는 무거운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점점 서정시를 전문으로 쓰는 무명 시인의 길을 걷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을 고발하는 기능을 하는 이성(理性)의 색이 짙은 비판시와 다른 하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순수시로 나뉜다. '시'의 주인공 양미자는 순수시를 쓴다. 양미자는 남편도 없이 외손자와 함께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며, 돈 벌기 위해서 요양보호사로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데다 딸은 이혼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현실 비판적 작품이 아닌 서정시를 지음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확실히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도 앞날이 보장되질 않는다. 살기는 더욱 팍팍해지고 들리는 것은 범죄 소식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시를 쓰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순수성을 간직하고 싶어서일까.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시기에도, 독재 정권이 판을 치는 시대에마저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예술 영화이긴 해도 의외로 주제는 찾기 쉽다. 바로 '시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다. 항상 밝고 낭만적인 노래만 부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실제로 행복하다고 장담할 순 없다. 자연 속에서 시상을 떠올리고 본질을 찾는 미자를 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저 할머니는 팔자 참 좋군. 이런 상황에서 꽃이나 관찰하고 있다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자와 비슷한 환경에 놓인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린 여중생이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사회를 비판하는 시, 가난을 헤쳐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혹은 서민을 보살피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 시),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하는 남학생들의 불량함을 개탄하는 시를 쓸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움, 본질을 찾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함이란 곧 단순함이고, 단순함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본질에 대한 규명이다. 이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본래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우리는 육안으로 사과를 보지만 시인이 말하길 "우리는 단 한번도 사과를 본 적이 없다"하였다. 우리는 인위적인 사물과 현상을 분석하거나 피상적인 질료를 볼 줄만 알지 진정 본질을 본 적은 없다. 그렇다, '본질을 본다' 애초에 성립이 안 될 것이다. 진정 본질을 보려면 추상적 말과 사고로 봐야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매체가 바로 '시'다.

 미자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본질 탐구는 삶과 죽음이 아닐까? 앞으로 살 날보다 여지껏 살았던 날이 더 많은 미자, 요양보호사 미자가 돌보는 뇌일혈로 거동을 못 하는 죽을 날만 바라보는 노인, 16세에 생을 마감하고 만 소녀... 미자가 보기엔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최후가 어떻든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피해갈 수 없다. 이 세상에 난 것들은 언젠가 가게 되어 있으며 자연의 섭리를 따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다.

 피고 지는 꽃, 떨어진 과일 - 그저 자연스럽게 섭리를 따르는 사물이 미자에겐 탐미의 대상이다. 좋은 환경에 태어났든 그렇지 않든간에 자연의 일원으로 태어나 부대끼고 살아간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사물은 다르지 않다. 뇌일혈로 오랫동안 성 불구자로 살았던 할아버지도, 자살한 소녀도 단순한 연민의 대상을 넘어 보듬어야 할 자연의 일원이다. 작년 노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 몸을 던지기 전 남긴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라고 썼듯 삶과 죽음은 연결된다. 

 가난한 미자이지만 미자는 자연에 존재하는 일원으로서 본질을 탐구했을 뿐이다. 다만 500만원을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의 계속적인 배치는 영화의 흐름을 다소 방해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시상을 떠올리는 유미주의자 미자를 강조하고 싶은 의도였을까?

 미자에게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다는 설정도 다소 작위적이다. 미자는 단어를 자꾸 잊어버린다 했는데 인간이 약속한 언어란 이성의 산물이다. 하지만 예술은 이성보단 감성, 의식보단 무의식이 앞서야 하므로 미자에게 더욱 어울리는 설정이라 그렇게 했을까? 시도 언어란 도구로 나타내긴 하지만, 시에 담겨있는 감성과 철학은 언어의 과학적 기능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소쉬르는 '말에는 애초부터 인간의 내재된 사고와 감성을 담고 있다'라고 하였다. 과학으로 풀어쓰지 못하는 세상의 원초적 요소를 시는 멋있게 포장한다.

 에필로그는 인상깊었다. 소녀에 대한 단순한 추모를 넘어 비록 어린 나이에 자살이라 할지라도 흙으로 돌아간 육체, 제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연인으로 돌아간 영혼... 이 작품의 중심 주젤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팍팍한 시대라지만 우리는 너무 아름다움을 잊고 산게 아닌지 한 번 돌아보자. 골치아파 보이는 영화였지만 의외로 지루하지 않고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들었던 내용을 상기시켜주는 영화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