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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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세대가 바뀌면서 만화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좋아졌다.

작가들은 소설, 시, 수필의 대안으로써 만화를 그리고 세세한 감정을 읊거나 사회 현실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는 몇 년 전부터 만화책을 구비하기 시작하였다. 본

작품은 현대 소설 전문 출판사로 유명한 창비(창작과 비평)에서 출간하였는데 '십시일反'

처럼 리얼리즘을 다분히 담고 있다. 제목이 왜 하필 '그녀의 완벽한 하루'일까? 어딜 봐도

패배자들의 음울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반어법으로 그렇게 정했을까.
'비오는 날'은 사회복지사의 이야기이다. 어느 독거 노인의 시신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문

득 전날 옆으로 누워 잠든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는 노인의 죽은 모습이 곧 자신과 별

개가 아니라는 작가의 의도인가? 소외받은 사람들을 매일같이 돌보아야 하는 타성에 젖는

직업의 특성일까 아니면 제도 내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무상함과 허무함을 느껴서일

까? 마지막에 연인의 전화를 받지 않고 병실을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끝까지 허무함을

안고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가는 비 온다'라는 시만큼 은근히 난해한 만화다. '영원

의 한쪽'은 한낮의 몽상을 자아내는 서정시다. 연인에게 하는 말인지 괴로운 현실을 피하

기 위한 혼잣말인지는 모르지만 작가는 이 시에서 받은 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두 사

람만의 낙원에서 살자라고 말하는' 고백을 떠올리고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 김발근례는

수십년 전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던 때를 생생하게 꿈꾼다. 다음날 젊은 시절 사랑의 도

피를 결심했던 순간에 젖어들어 정신을 잃어가며, 달콤한 죽음으로 인도된다. 여기 나온

단편들 중 드물게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인상을 준다.
 '나는 천국으로 간다'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백화점 판매원으로 근무하는 박윤정의 이야기

를 다루고 있다. 동창들보다 사회에 4년 일찍 나왔지만 늘 고된 노동과 박봉, 정신적 스트

레스에 시달린다. 딱딱한 구두를 장시간 신고 일해야 하는 박윤정의 현실을 '발이 편한 구

두를 신어본 적이 없다'라는 첫 문장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시의 두 번째 연이 인상깊은

데 가진게 없는 사람들끼리 빠져나갈 곳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 반목하고 자기 자릴 한 뼘

이라도 지키기 위해 안간힘쓰는 - 그래봤자 결국 얻을 것도 없지만 - 허무한 모습을 묘사

하고 있어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돕기는 커녕 으르렁대게 만드는 현실을 지

켜보고만 있을 뿐, 윤정은 그렇다. '나는 천국으로 간다'는 현실 도피적이고 반어적인 성

격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아이'의 정지은은 아직 신혼인데도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

로 매일같이 시어머니에게 시달리지만 임신하는 바람에 자유를 찾는 길은 더욱더 멀어진다

. 정지은은 시처럼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삶에는 정답이 없고

잘못 사는 것같이 보이는 삶에서도 분명 깨닫는 것이 있기에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

이라고'라고 마음 속 어디에서 목소리를 듣는다. 낙태를 감행해서라도 이혼하고 싶지만 운

명의 장난은 그녀를 삶에 옭아두게 된다. 잠은 굉장히 쉬운 일이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에

는 별의별 상념이 다 드는 법이다.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쩔수없이 타협해야 하고

잘못사는 삶도 삶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는데 우리도 이와 같지 않은지. 어느 순간 내가 잘

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이것도 다양한 삶의 일부라고, 이것의 나의 인

생이고 삶의 깊이를 체득하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는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일탈이라고 보았는데 출판사 편집자 김미

영과 대학 시간강사 유상현의 단 하루에 그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일상이란 담백하고

잔잔하게 심금을 울리지만, 정작 일상의 본질에 대해서 답하는 일은 어렵다. '내리실 문은

옳은 쪽입니다.' '문득 나는 굳게 다문 왼쪽 입口로 나가고 싶어졌다.'처럼 일상에서는 항

상 상식적인 방식만을 허락하지만 살다보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싶어한다. 유상

현은 대낮에 김미영과의 성교를 즐기지만 얼마 안있다 학생들 앞에서 태연하게 모범적인

태도로로 강의한다. 그렇다. 박혀 있던 상식과 평온하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 있

더라도 평정어린 마음으로 생활하는게 쉽지는 않다. 김미영도 5년전 하룻동안 사귀었던 남

자를 모르는체 하고 아무리 소란이 있었어도 세상은 그렇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러

간다.
'선택'과 'Perfect day'는 서른에 가깝지만 기반 잡기는 커녕 먹고살기도 힘든 인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삶이 나아지지도 않은채 희망을 잃어간

다. '행운목'도 마찬가지. 추락만 거듭하는 삶을 보며 독자들은 과연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까. 우리는 항상 불행한 삶이 극적으로 바뀌는 이야기를 원하지만 삶의 가장 어두운

면만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예술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표지만큼이나 우울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언제나 밝은 이야기만을 쓸 수는 없다. 어두

운 부분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일도 그들과 다를바 없는 우리의 고통을 덜어내는 방법이며

삶의 어두운 부분을 통찰하게 해준다. '그녀의 완벽한 하루'는 비현실적인 고딕 문학이나

난해한 글이 아닌 사람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현실을 만화로 옮겨놓아 일반인도 쉽게 이해

하고 공감하게 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현대시를 읽고 작화가 나름대로의 감

상과 인상을 그려놓았다는 점도 독특하다. 이 서적은 예술 사이에 경계란 허구이며 유연한

사고와 감상이 참신한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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