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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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없는 한 가족이 있다. 20살 이경은 할아버지와 삼촌, 이모와 산다. 서로 이름이나 호칭을 부르지도 않고 서로를 향해 아무 말도 없다. 이경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아 너무 외롭다. 딱 한 번 이모에게 “이경아~”라고 불렸지만 이모는 다음 날 바로 떠났다. 불행의 진창으로 더 끌고 갈 이 외로움은 자기 이름이 호명되기 싫었던 한 사람, ‘삼촌의 여자’에 의해 멈추게 된다. 


“누구의 배 속도 빌리지 않고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p.38)

이경의 외가족들은 이경을 왜 그토록 외롭게 두었을까. 아마 그들도 제각각의 불행을 견디느라 고달팠고, 상대의 불행을 보는 게 힘들어서 피하고 살았던 것 같다. 서로를 마주 보며 밥을 먹고 대화를 하면 상대방의 불행의 무게까지 자신이 지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가족들은 서로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 존재를 외면하고 지울 수 있는 가장 쉬울 방법이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서로의 눈을 볼 필요도 없고 깊은 대화도 하지 않을 수 있다. 함께 밥상에서 둘러앉아 밥을 먹지 않으면 가족 간에 얼굴 볼 일도 없다. 그러나 이경은 삼촌의 병실을 찾기 위해 삼촌의 이름을 기억해 낸다. 또한 삼촌의 여자는 이경에게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알려준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가족 간의 어두운 분위기를 밝혀주는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진다. 작은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그녀의 배를 흘깃거린다. 배는 불룩히 솟아 있다. 벌써부터 나는 그녀 배 속에서 나올 아기의 발가락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진다. 그녀처럼 하얗고 기름기름한 발가락일지 아니면 삼촌이나 할아버지처럼 짧고 뭉툭한 발가락일지. 아무려나 삼촌은 곧 아버지가 되고 나는 사촌을 얻게 된다. 꽃씨를 뿌릴 때쯤 아기는 태어난다. 이모가 빠지지는 했지만 모처럼 식구가 다 모였다. 사진 속의 할아버지, 삼촌과 그녀. 그리고 나. 밥상은 꽃밭처럼 화려하다. 오늘은 할아버지 생신날이다.(p.103)


이제야 밥상이 꽃밭처럼 화려해졌다. 모처럼 식구가 밥상 앞에 다 모였다. 이런 적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삼촌의 여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 큰 불행이 올까 밀어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행복한 가족”이란 환상에 가깝다고 본다. 대부분 아주 불행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그냥 산다. 크고 작은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죽고, 떠나고, 다치기도 하고 또 희망의 씨앗을 품은 새로운 구성원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족은 고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 또 어떤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흔들릴 수 있지만, 반면에 새로운 움직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조경란의 <움직임>은 1997년 출간된 중편 소설이며, 불행의 터널에 갇힌 가족들이 선택했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20살 이경의 시선에서 외가 가족들의 모습이 주관적으로 묘사되고, 외롭고 혼란스러운 화자의 마음이 짧고 간결한 문체로 서술되고 있다. 가족이라는 주제는 지금도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이야기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저절로 좋아지고 유지되는 관계란 없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임이 이어져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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