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 브러더스 사계절 1318 문고 45
우오즈미 나오코 지음, 고향옥 옮김 / 사계절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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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는 순간 놀랐다. 브라더스라니?

동화에서 게이 문제를 다루리라고는 상상해 보지 못했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게이 문제를 동화 속에서 다루려 했을까?

핑크색 구두에 하얀 스타킹을 신고서 뜨게질을 하고 있는 여자, 저 떡 벌어진 어깨가 바로 주인공 히비키의 형이다.

히비키의 형은 게이다.

히비키는 그런 형을 통해서 비로소 상처를 치유 받게 된다.

어떻게?

......

작가는 제목에 주제를 선명하게 들이민다.

'하모니'라고.

하모니?

그래, 하모니.

조화.

조화로운 삶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조화란 무엇일까?

남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

남의 다른 점을 이해하는 거,

그게 조화다.

그러나, 현실은 형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그를 낳아 키운 부모나, 사회 어디에도 그의 형이 발 붙일 곳은 없다.

그러나, 히비키의 게이 형은 자신이 여장을 할 때에라야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단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간음을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를 단지 자신들과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경멸하고 천대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형을 경멸해도 형은 자신이 선택한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방법만이 형이 부모의 기대와 욕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형 몫의 기대까지 한꺼번에 받은 히비키는

자신의 참된 목소리와 부모의 욕망이 뒤섞인 채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차갑고 냉정하며 비열하기까지 한 아이로 변해 간다.

히비키는 자신이 그렇게 변해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친구를 이용하고, 배신하고, 가족을 속이고,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된 히비키.

히비키는 자신이 늘 차지하던 우등생의 자리에 다시 설 수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전교 수재들만 모아 놓은 특목 중학교 내에서는

히비키의 성적은 별 볼 일 없어졌다.

히비키는 자신의 그런 처지를 부모에게 털어 놓을 수 없다.

부모는 절대 그런 히비키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히비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히비키에 대한 절대적 기대는

히비키 자신에게는 절대적 절망으로 자리 바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히비키의 삶 속에 불현듯 여장을 한 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히비키는 그들의 부모가 그의 형에게 그렇게 대했듯이

형을 무시하고,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서서히 형이 느끼는 평화에 매료된다.

히비키가 골방에 숨어서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하던 자신 내면의 평화를 형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비키는 형의 쾌활한 웃음과 평화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형이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형의 처지와 현실을 이해하게 된다.

히비키 자신도 그런 처지와 현실에 놓였으므로 히비키가 형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부모가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비하면, 히비키의 형에 대한 이해는 순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히비키는 비로소 밝힌다.

그 동안 집 안의 화분을 깬 범인이 자신이었음을. 자신의 선택한 파괴적이고 범죄적인 방법 말고도 형이 선택한 방법을 배웠으니까. 이제 속 시원하게 자신의 범행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 히비키의 범죄보다는 그래도 형이 선택한 여장의 방법이 훨씬 더 반 사회적이다.

....

이 책을 통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멀리하고, 혐오하며 무조건 피하려 했던 내 편협한 자세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하모니.

조화로운 삶.

그것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은

편견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동화에서는 게이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부터가 편견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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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별 푸른도서관 16
강숙인 지음 / 푸른책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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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도록 새롭다. 역사 소설이 이토록 감성적일 수 있을까?
  강숙인 님의 <초원의 별>을 읽고 나는 천년의 세월을 가볍게 거슬러 올라가 눈 앞에서 그리는 행복을 맛보았다.
  <마지왕 왕자 >의 뒷 이야기로 연결되어 더욱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왕자>에서 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의 투항에 통곡하고 길을 떠나  거친 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태자의 신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그렇게 끝난 것이 나는  참으로 아쉬웠다.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모으던 형이 아버지의 투항에 통곡으로 대응하고 끝나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글은 거기에서 그쳤다.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던 태자의 신라에 대한 꿈은 그저 꿈으로 그치고 마는 것인가?
  전쟁으로 백성들을 피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던 아버지 경순왕의  판단이 옳은 건가? 태자는 아버지가 말한대로 현실을 극단적으로 판단한 건가?
  책을 덮었는데도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초원의 별>을 읽게 되어 속이 후련하도록 다 풀어 냈다. 나는 내가 원했던 질문에 대한 답들을 하나씩 정리할 수 있었다.
태자는 끝까지 신라를 재건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삼베 옷을 입고 평민처럼 살면서도 신라의 정신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기파랑처럼 높은 인격과 맑은 정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지도자에 의해 이룩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태자는 아들 새부에게 신라의 정신을 이어준다. 그리고 태자의 아들 새부는 아버지의 뜻을 새겨 금나라의 시조가 된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현된 허구다. 작가는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한 나라가 건설되는 것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
  새부는 평민들 속에서 자라는 동안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새부의 행위는 위대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할 줄 알았고, 자신을 끊임 없이 갈고 닦아 수양했으며, 인내할 줄 알고, 순종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 왕자라는 피가 새부를 그렇게 하게 했을까?
  아니다.
  작가는 새부를 허약한 아이로 그렸다. 허약한 새부가 신하 김시중의 극진한 정성으로 몸을 되찾는다. 위기에 처한 새부가 목숨을 걸고 구하겠다고 나서는 친구 다복이에 의해 위기를 극복한다. 새부는 왕자라서 신라 재건의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위대한 정신을 잇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작가는 여러 군데에서 새부의 인간미를 보여준다. 왕자다운 기개와 영웅성은 찾기 힘들다. 평범하고 허약하기까지 한 새부를 보여준다. 새부는 매번 위기 상황에 놓이고, 그런 위기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결한다. 새부를 돕고자 나서는 사람들은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과 부와 권력을 다 버리고 새부를 돌보는 김시중, 다복이, 초희, 만석이, 진군, 아린. 그리고 새부의 헌신적 사랑을 깨닫고 그를 추장으로 내세운 여진 사람들....
  신라 재건과 전쟁과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다. 작가가 이런 질문을 내게 한다. '진짜 중요한 게 뭘까요?, 진짜 높은 게 뭘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기존의 역사물들이 영웅담 일색이었던 반면 이 글은 무덤 속의 인물을 피가 돌고 심장이 뛰는 따뜻한 인물로 생생하게 그려준다.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주면서, 그의 무력해 보이는 결정에 동의하게 한다. 왕자가 포기하는 순간에 나도 포기하고, 왕자가 어쩔 수 없다면 인내하는 순간에 나도 인내해야 하는 것을 배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무엇하나 내 뜻대로 쉽게 되는 일이 없다. 결코 만만치 않다. 다만 노력할 뿐이다.  영웅 이야기에 호감이 가면서도 감성적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성적으로 공감하게 한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라 한다. 조국애도 허상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왕족이 되거나 권력을 갖거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다. 올바로 사는 것이다. 꿈을 갖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권력욕과 비인간성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작가가 그려준 새부처럼, 아름다운 인간성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이 작품은 아이들에게 꼭 권장하고 싶다.  역사적 상황을 주석하나 달지 않고 깔끔하게 문장으로 풀어 설명해주어 내용 이해가 참 쉬웠다. 친절한 설명이 처음엔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뒤로 갈 수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야기 속에 더욱 더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역사를 재건과 땅 뺏기 싸움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미 중심으로 다뤘던 점이 더욱 흥미로웠다. 이런 감성적 역사 소설이야말로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여 역사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할 것이다.
  한 줄 한 줄 그냥 넘길 수 없어 밑줄 긋고 별표를 달았다. 좋은 행위는 아니지만 내 책이니까, 괜찮다. 작가가 해 준 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글줄기들을 표시해 두기 위해서다.
  참 고맙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 얼마나 꼼꼼히 고치고 생각하기를 반복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낯설도록 새롭게 공감하긴 어려웠을 테니까.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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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잡자 - 제4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8
임태희 지음 / 푸른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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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게다. 선생님은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는 사람이고, 아이들을 대학엘 보내야 한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된다. 보인다해도 해결할 방법도 별로 없을 것이다. 주홍이 담임이 처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한다. 현실이니까. 그러나, 주홍이 담임은 궁금했다. 정말 사물함 속에 쥐가 들었을까가 궁금했다. 그러면서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알아서 본인이 잘 하겠지 하는 개인주의적인 소극적인 자세로 아이를 방관하고 만다.
주홍이는 17살. 고등학교 1학년. 임신을 했다. 주홍이 엄마는 20살에 아빠 없이 혼자서 주홍일 낳아 키웠다. 주홍이 엄마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긴 시간을 보내왔다. 이제, 결혼도 하지 않은 딸이 아빠도 없이 아이를 가진 상황에 대해 모르는 척한다. 냉장고 속의 쥐를 끝까지 억지스럽게 방관한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열고 닫아야 하는 냉장고인데 그냥 둔다. 그러다, 주홍이가 낙태 수술을 받기 전날 냉장고를 연다. 몇 달 동안 방치돼어 있던 냉장고 속 음식들은 모두 썪었지만 그래도 쥐는 없었다. 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엄마는 주홍이에게 낙태 수술을 받게 한다. 쥐는 처음부터 엄마의 마음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주홍일 낳은 이후 받은 세상으로부터의 상처가 쥐가 되었던 것이다.
낙태 수술을 받은 후 주홍인 끝내 자신의 몸에서 자라던 한 생명을 거부한 죄책감으로 죽게 된다.
그제서야 주홍이 엄마는 자신의 가슴에서 쥐를 몰아 낸다. 주홍이 담임도 그제서야 쥐를 몰아 낸다.
내 가슴에도 쥐가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내 가슴에 숨은 쥐를 잡아야 한다. 모두들 쥐가 있다. 쥐를 잡아야 한다. 피해도, 방관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잡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내 딸이 살고, 내 딸의 아이가 산다.
주홍이. 진주홍.
진한 주홍 글씨 같은 아이.
미혼모인 엄마의 가슴에 형벌 같은 주홍 글씨로 새겨진 아이.
잉태할 수 있다는 축복이.
잉태할 수 있던 때에 사랑을 나눈 행복이
형벌이 된 아이.
....
이 작품을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말 짜증이 났다.
왜 담임은 그토록 제 가슴에서 울리는 자신의 진실을 외면했나?
왜 엄마는 제가 살아온 삶을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했나?
왜 항상 남만 의식하며 사는가?
자신이 느끼는 진실, 자신이 느끼는 생명의 기쁨, 자신이 당당하게 거부하며 이끌어온 삶의 행복을 왜 무시하나?
돌아보니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현실 이야기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에 자신의 진실을 담지 않고 쥐를 담아 키우고 있다.
쥐를 잡아야 한다. 그런 편견을 버려야 한다.
받아들이고, 사랑해 줬더라면.
이해하고, 그대로 주홍이 그대로 받아 줬더라면.

<"아기......낳아 볼까?"
그 순간 나는 돌아 버렸다. 거칠게 걸어가서 따귀를 때렸다. 고개가 홱 돌아가고 새빨간 손자국이 났다.
우리 둘레에 쳐진 높은 벽을 보라고 고함을 칠 작정이었다. 내가 그 앨 낳고 어떻게 살아 왔는지 지루하게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다음 주에 수술 날짜 잡혔어요."
딸아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17살 주홍이는 그래도 용기내어 낳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엄마의 용기 없음이 아이를 내몰았다. 엄마의 자신에 대한 확신 없음이 아이를 내몰았다.

이 작품이 널리 읽히길 바란다. 저마다 마음 속에 쥐를 키우고 있는 숱한 사람들 속으로 널리널리 퍼져 읽히길 바란다. 그래서 낙태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7살 아이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아이를 키울 여건이 되든 안 되든 아이는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을 깜박 잊고 사는 세상이 그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홍이 뿐인가? 숱한 여자들이 지금도 낙태 수술을 한다. 성교육도 개방 시켜야 할 일이고, 낙태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차피 아이는 부모가 혼자 키우지 않는다. 사회가 같이 책임져 주어야 할 일이다.
양호 선생님이 따뜻하게 주홍일 받아주고 이해해 줘서 고마웠다. 그래도 적극적이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다. 양호 선생님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방관이라는 이름은 담임이나, 엄마나,양호 선생님이 다 똑같다. 무슨 하늘의 천벌이나 받은 것처럼 궁상을 떠는 할머니하고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들 양심의 범죄자다. 주홍이를 죽게 방관한 죄를 지은 양심의 방관자들.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더 이상 커지거나 확대되지 않도록 다들 마음 속의 쥐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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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불빛 (양장)
셸 실버스타인 글.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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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쉘 실버스타인 “다락방의 불빛”

이제 다락 대신 옥상이 있다. 다락 대신 위층이 있다. 이제 없는 다락이라는 공간에 켜진 불빛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할까?
  쥐가 드나 들고, 엄마의 오래된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고, 허리를 구부려야 할 만큼 천장이 낮고, 낮에도 어두운 그 곳이 바로 우리 집 다락이었다. 나는 나만의 은밀한 공간을 찾아 다락으로 숨어들곤 했다. 다락방으로 숨어 들어간 나는 비로소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 나 혼자만의 시간. 작가는 ‘다락방의 불빛’에서 주로 혼자만의 자유로운 상상을 보여준다. 아이처럼 발랄하고 엉뚱하다. 그 발랄하고 엉뚱함은 곧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를 누구나 낯설게 하고, 누구나 재미 없어하는 얘기를 누구나 호기심을 느끼게 한다. 마치 다락방으로 숨어 들어갔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맘껏 자기 방식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
  관습과 타성에 대한 반문.
  겉과 속의 다름에 대한 비판.
  통념에 대한 엉뚱함.
  통통 튀는 재치.
  눈치 보지 않고 멋대로 끝내는 천진함.
  
‘아낌 없이 주는 나무’에서 보여 주었던 진지함이나 서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그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에게 다락방의 불빛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자칫 섬짓한 그림이나 통념을 깨는 발언이 비도덕적이라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읽다보면 비도덕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아이들의 장난기로 여겨진다. 아이들의 장난기에 비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어른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읽으면 된다. 그러면 아이들과 비슷한 마음 상태가 되어 내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모두 훌륭했지만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마구 흔든 작품은 ‘굴루 새’이다. 다리 없는 굴루 새는 착륙할 수가 없다. 그래서 늘 날아만 다닌다. 둥지를 틀 수도 없고 새끼를 둥지 안에서 키울 수도 없다. 그래서 굴루 새는 알을 허공에 낳는다. 그러고는 기도한다. 알이 안전하게 떨어지기를.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 현대인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난다는 것도 결국은 정착하기 위한 과정인데 과정에만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자기 자신은 전혀 노력하지 않고도 모든 일이 잘 되기만을 말로만 기도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꼬집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두고두고 읽고 싶다. 가벼운 마음으로도 읽고, 고민을 툭 털어내듯 통념을 털어내고 싶을 때도 읽고, 대화가 안 되는 어떤 사람과 대화의 통로로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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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이야기 - 2005년 제11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비룡소 창작그림책 28
박연철 글.그림 / 비룡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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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를 다룬 책들이 무게감과 학문적 고증에서 맛을 잃고 재미를 잃고 있을 때,

이 책은 발랄하게 우리 문화를 다룬다.

아이는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천상과 지상의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며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었다. 또한, 어처구니들의 어처구니 없이 익살스런 표정 때문에 아이는 책 읽는 내내 웃었다.

문화를 다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지나치게 재미로만 치우치지도 않게,

아이들에게 유익성과 재미를 동시에 줄 수 있는 그림책이 몇이나 될까?

난 선뜻 이 책이 그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일 거라고 말하고 싶다.

군더더기 문장도 하나 없을 뿐 아니라, 문장이 지나치게 많아서 부담을 주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그림도 고구려 벽화나 전통적이고 옛스런 색을 참 잘 살려냈다. 아이들이 그린 듯한 비대칭 그림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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