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은데, 마음은 여전히 비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 알았다. - P25
귀신은 말이지. 쫓아낼 수가 없어. 귀신은 일단 한번 들어와 눌러앉으면 쫓아내려야 쫓아낼 수가 없어. 업보 앞에선 법력도 소용없는 법이거든. - P31
인간의 눈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사당은 이승의 좁은 땅 한 귀통이에 서 있는 겉모습뿐이다. 그러나 신은 다르다. 신은 그 겉모습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꿰뚫어 신의 영역까지 볼 수 있다. - P34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뭐가 좋아? 어차피 늙고 병들고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도 겪어야 하는데. - P46
하늘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웠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몇 번 들렸을 뿐, 주위 풍경은 성황묘에 들어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고요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12시 2분을 지나고 있었다. - P70
세상 모든 것이 이유 없이 미웠던 시절, 그는 마치 세상이 자신에게 큰 빚이라도 진 것처럼, 어디든 두어 번 힘껏 걷어차 틈을 내고 거기서 위안을 얻으려 했다. 그건 아마 사랑을 알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사랑은 외로운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 P74
기억은 세월에 뒤덮여 모두 희미한 빛무리가 되었고, 너무 부드럽게 번져 이제는 세세한 윤곽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삶을 밝혀주었던 빛만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빛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 P90
두 노인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 속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상인이자 아버지이자 은인이었던 그 남자가 더없이 너그럽고 흐뭇한 미소로 두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눈에 담겨 있던 빛이 두 사람의 눈 속에도 스며들었다. 혼란스럽고 황폐한 시대에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빛이었다. - P92
황혼의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저무는 해와 바다가 빚어 내는 색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했고, 바닷바람마저 눈부신 금빛을 머금은 듯했다. - P94
마늘밭의 사계절이 돌고 도는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문득 내년이면, 자신과 딸은 또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괜찮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쓰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좋은 약 한 첩을 찾아냈으니까. - P138
막을 수 없는 폭포수 같은 엄청난 전류가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물보라가 가장 거세게 튀어 오르는 자리에서 부자연스러운 빛이 일었다. 빛은 점점 더 밝아지더니, 마침내 한계를 넘어 대낮 같은 강렬한 섬광으로 터져 나왔다. - P219
맑은 날, 비 오는 날, 풍속, 기온, 자외선의 예보와 관측은 사람들의 일과 생활, 나아가 기분까지 좌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상 정보에 무척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번개에 관심 갖는 사람은 없다. 차라리 습도 지표가 번개보다 더 눈길을 끌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는데, 보도할 가치가 있을까? - P228
신이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믿고 받들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신이 해야 할 일은 자기 힘을 다해 사람을 지키고 구하는 것이었다. 설령 단 한 사람일지라도. - P239
바람이 용기를 불어넣어 줬는지, 그는 문득 먼 곳을 향해 길을 떠나고 싶어졌다. 바람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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