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에게 인생은 퇴직 없는 근무일 뿐이었다. 영수의 유일한 바람은 영원한 퇴근이었다. 하지만 영수는 혼자 좋자고 남은 가족들에게 그 짓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영수는 착한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모진 사람은 못 되었으니까. 영수는 죽을 수가 없다. 영원한 퇴근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 P12
어떤 감정은 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긴 밤, 한 시절, 어쩌면 일생 동안을 이야기하게 만드는 감정. 보통은 연애의 감정이, 사랑의 심정이 그럴 수도 있다던데. 하지만 어쩐지 영수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될 것 같은 불안한 확신이 들고 있었다. - P53
몸을 창밖으로 내민 인간은 울상이지만, 다리를 잡은 인간의 웃는 얼굴 같다. 죽으려는 인간과 말리는 인간, 두 인간은 몹시 닮았다. 한 사람이라 해도 믿겠다. 대체로 한 사람이긴 하다. 죽으려는 것도 나, 말리는 것도 나. - P56
숲을 향해 선 영수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람이 숲을 돌아오는 소리. 사람을 감돌 때는 고요하다가 숲을 만나면 소리를 내는 바람들. 영수는 그리고,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언제나 두 눈을 머물게 하는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에게. 누가 영수에게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물론 여태 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영수는 언제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는 일이라고 답할 수 있었으니까. - P108
그 사람을 감싸고 있다는 그 벽의 두께에 대해서도 가늠해보았다. 그 벽을 뚫는 건 의지일까, 의도일까? 아니 얼마만큼의 의지를 가진 의도여야 할까?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게 상상 속에서도 이미 맘에 걸리는데, 의도는 꼭 가져야 하나? 의도가 아니면 어떤 마음이어야 하나? 다가가는 마음 그것은 뭐지? 다가간다는 건 어디까지를 말하는 거지? 근데, 나 어떻게 다가가나? 나 진짜 다가가는 건가? 아니, 내가 누구한테 다가갈 수는 있는 인간이긴 한가? - P115
깊이 앓고 난 후, 하지만 그 사람과의 기억은 다시 떠올랐다. 지워보려고 애썼는데, 선명했다. 하루의 어느 시간도 어느 시간의 어느 순간도 잊히지 않았다. 떠올리면서도 아팠다. 좋은 기억만, 함께했던 기억만 떠올리고 싶었다. 그 사람이 떠난 기억은 잊었으면 했다. - P173
인생이라는 큰 틀은 반복되는 게 맞아요. 그건 바꿀수 없어. 하지만 디테일들, 그 디테일은 바꿀 수 있어. 쉽게 말해서,내가 영화감독 되려고 했다 했죠? 영화를 보면 결국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건, 그 원형은 크게 바뀌지 않아. 관객들이 익숙하고 좋아하는 플롯은, 그런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그냥 새로운 에피소드만 추가되는 거야. 그래서 제길, 꼭 인간이 아니어도 에이아이가 그렇게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는 거라고. - P180
영수를 보는 0수의 눈 속에는 충격과 원망, 후회와 불안, 분노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하나, 하나로도 충분히 무거운 그 감정들의 무게의 총합에 눌려 0수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졌고, 양손은 쥐어졌고, 쥐어진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 떨림이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두 다리 또한 위태롭게 한다. - P236
영수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으로 늘 부족하게만 여겼다. 돋보일 것 없는 자신의 삶을 탓하기만 했다. 대단하지 못했으니 쓸모없다 단정했다. 하지만, 도드라지지 않아도 존재하고, 부족함도 채워진 상태고, 불안함도 동력이었다. - P284
이제 영수에게는, 또다시 죽는 일만 남게 되었다. 또다시, 어떻게 죽을까만 남았다. 원래 영수의 몫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었다. 남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거였다. 살인이리는 거대한 죗값을 치르기에도 사라지는 쪽이 적절했고, 영수가 오랜 시간 바라던 것도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마냥 신이 나지는 않았다. 사는 동안 언제나 즐거운 상상이었던 인생 근무를 끝내는 일이, 영원한 퇴근을 앞둔 지금, 영수는 어쩐지 어딘가 쓸쓸하기도 했다. - P293
내가 여태 살아온 목적은, 인간이었던 그 친구가 죽기 전에 심어놓은 기억이었고.... 복제인간이어서 살아갈 이유도, 방향도 목표도 잡을 수가 없나 봐. 애초에 내 인생이 아니라서. 그냥 강요받은 인생이라서. 나는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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