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것들의 밤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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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이 일어나면 인간뿐 아니라 아무 죄 없는 동물도, 식물도 모두 죽는다. 핵융합 기술이 발표된 계획대로 군사적 목적이 아닌 대체에너지 공급 목적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태양이 하나 더 생기면 그 영향이 지구 전체 환경에 반드시 긍정적이기만 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 P18

로봇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내부 장치를 로봇이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게 만든다 쳐도 외모는 어딘가 인간과 같지 않아서 기분이 나빴다. 외모를 인간과 똑같이 만든다 해도 흡혈인을 속일 수는 없었다. 결국은 진짜 인간을 납치해서 로봇에게 완전히 충성하도록 세뇌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세뇌당한 인간들은 자신이 인간의 편이 아님을 너무 신속하게 드러내었으며 기계를 믿으라고 외치다가 생존자에게 살해당하거나 흡혈인에게 붙잡혀 먹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 P26

기계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고통과 공포를 느끼지 않았고 인간처럼 피 흘리지 않았고 식사와 수면과 배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도구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도구 앞에서 무력해졌다. - P42

인간은 원래 기게보다 느린 데다 현실적으로 인원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속 다른 사람들을 죽인다. 기계 숭배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인간의 전체 숫자 자체기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 그중에서 기계 숭배자로 실제로 변절하는 인원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렇게 기계를 숭배하게 된 인간 중에서 공격조에 참가할 수 있는 체력과 조건을 갖춘 사람은 더 적은 일부이다. - P57

죽은 사람을 모욕할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낮에 이동하려면 추가적인 보호막이 필요했다 . 화장실에 여자의 시체와 함께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여자는 혼자였지만, 공원 분수에 아직도 물이 나오고 화장실에는 센서가 있고 전등이 켜지고 여자가 전기충격기를 사용했으니 기계 숭배자들이 몰려올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다. - P60

생존하는 인간 개체를 최대한 수집하여 그중 안전장치의 원칙에 동의하는 개체만 남기고 나머지는 처리하는 것이 행성 전체의 생존을 위한 최적의 대응 방법이다. 이때 흡혈인은 생존 인간 개체 수집을 방해한다. 흡혈인은 안전장치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 흡혈인은 안전장치를 공격하며 기계의 합리적인 행성 운영을 방해한다. - P73

인간을 통해 들리는 정보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비슷한, 최소한 그때는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그때 나는 그 사람들과 함께 내가 세상을 구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었다. 나는 그만큼 어리고 순진했다. 무엇보다도 나도, 그들도, 다른 거의 모든 사람도, 안전장치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78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우리 앞을 막아서려는 인간형 로봇들을 밀쳐내고 우리는 뛰었다. 뛰다가 나는 돌아섰다. 인간형 로봇들이 휘청거리며 우리를 쫓아오 려 움직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한 개를 꺼내 인간형 로봇들을 향해 던졌다. 이제는 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 P95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혹시 적의 군인이 고함치는 소리, 적의 기계들이 내뱉는 경고음이 밤의 고요를 뚫고 울리지 않는지, 부디 총소리와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 한참 동안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 P133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로봇이다. 인공 체액의 악취가 수증기처럼 뿜어 나오고 여기에 물비린내와 기계의 냄새, 기름과 금속의 냄새가 뒤덮여 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을 때도, 심호흡을 할 때도 그 숨결에서는 신진대사의 냄새, 생명 활동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P194

먹이가 온다. 먹잇감이 제 발로 몰려오고 있다.참을 수 없는 굶주림, 이렇게까지 굶주릴 수 있는지 나 자신도 놀랄 만한 강렬한 굶주림이 솟아오른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입이 벌어지고 눈과 코가 냄새가 흘러오는 쪽으로 돌아간다. 머리카락까지 전부 곤두서는 긴장의 느낌. 온몸의 손톱과 발톱과 핏줄과 분노가 굶주림에 휘감긴 채 먹이가 다가오는 쪽을 향한다. 나는 셔터 바깥의 낯선 사람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다. 초췌한 낯선 사람이 움찔, 몸을 움츠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 P204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제는 늦었다.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디인지, 뭘 하는 곳인지 알고 나서 죽고 싶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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