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니코 워커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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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인이 몸속을 파고든다. 가장 먼저 짜릿한 맛이 느껴지고 곧이어 흥분감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피가 따뜻하게 달궈지면서 온몸을 휘몰아친다. 평상시보다 그 효과가 강력해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그제야 온몸이 마비되면서 귓가가 멍멍해져 온다. - P14

얼핏 보니 유행에 뒤떨어진 차림새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늙은이라면 나 같은 놈이 뭔 짓을 하고 다니든 별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방금 은행을 턴 도둑놈처럼 행동하지 않는 거였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경찰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약쟁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썩어 빠진 나라여도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은행털이범으로 보이면 안 된다.절대로 뛰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뛰지 않는 거였다. - P25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자가 존재한다. 가끔 그 생각만으로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많은 여자가 그렇게 반짝이면서 그녀들만의 보이지 않는 세상과 비밀스러운 언어, 그 밖의 것들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시작하는데, 우리가 모든 걸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내 인생에 나타난 포악한 살인마들로 인해 무참히 짓밟혔지만, 그들도 누군가에거 먼저 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는 데는 한 치의 의구심도 없었다. 마치 나처럼. - P52

처음으로 철조망 바깥의 현장에 나간 터라 신경이 온통 곤두 섰다. 언제 어디서든 총에 맞을 수 있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나를 쏘려고 온종일 기다린 하지가 있을 만한 장소에 다다르면 나도 모르게 멈췄다. 최대한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P142

돌아오는 길에 다리에서 조약돌 소녀에게 전투 식량을 주었다. 아이는 가슴에 식량을 꼭 쥐고 달려갔다. 그런데 맨발의 사내아이에게 붙잡히더니 머리를 흠씬 두들겨 맞고 급기야 식량까지 빼앗겨 버렸다. 우리가 차를 몰고 떠날 때 조약돌 소녀는 흙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 P165

적당한 약이 없을 때는 컴퓨터 먼지 제거 스프레이를 흡입할 수 있었다. 여름이었고 사람들이 차례대로 죽어나갔다.여름에는 죽는 사람이 더 많다. 우리도 언제든 죽을 수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길이 없었다. - P213

이메일을 읽고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 때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곤 했다. 카드 게임이라도 벌어진 날은 굳이 끼어들어서 돈도 좀 잃었다. 나는 카드 게임만큼은 줄곧 운이 없었다. 이른 아침에는 대체로 카드 게임을 하지 않았다. 읽을거리도 거의 없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 P214

우리는 병장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1분 후 병장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남은 스프레이 캔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멀쩡했다. - P246

내가 경험한 공포에 사로잡힌 침울한 미친놈이었다. 끔찍한 공포를 경험하면 그렇게 망 가지는 법이다. 폭력적인 개자식들이 하는 말 따위는 관심이 없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이 말짱하다면 너무 무식해서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침울하기 짝이 없는 미친놈으로 사는 건 아무 쓸모가 없다. 결국은 자살하고 말 테니까. 그때 나는 유령을 보았다. 그리고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 P261

가을이었다. 나는 가을이 좋았다. 나는 완전히 파산 상태였고 세계도 경제 위기에 처했다. 어쩌면 이대로 세상이 멈출 것처럼 보였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는 가짜 인생을 살 수가 없었다. - P269

슬픈 사람과 자는 건 죽은 사람과 자는 거랑 같다. 건강한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코카인을 했고 감정적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일을 망치곤 했다. 그 모든 게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 P290

해가 뜨기 시작했다. 빗자루를 들고 편의점 지붕에 올라가서 주사기를 모으는데 차들이 하나둘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하러 나온 사람처럼 입었다. 그곳이 내가 일하는 자리인 듯 행동하려고 애썼다. - P298

뭐든 닥치는 대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우리는 아무 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저 점심이나 한 끼 때우려고 맥도날드를 찾은 것처럼 행동했다. - P317

은행을 털려는 사람 중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히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상관이 없다. 그저 사악하기만 한 개자식들은 절대로 남의 것을 훔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절도를 저지른다는 건 일종의 굴욕감 문제였다. 혹시 누군가에게 멸시당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조심해야 한다. 당신도 절도범이 될 수 있으니까. - P368

나는 팔뚝에 주삿바늘을 꽃았다. 바늘이 무뎌서인지 자꾸 혈관이 빗나갔다. 하지만 계속 빗나갈 일은 없었다. 살짝 따끔하더니 주사기 끝에 붉은 피가 고였다. 나는 주사기를 꾹 눌렀다.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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