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깜찍하게도 하기 싫은 숙제를 놀랍도록 초연히 내버려 두고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단지 아이가 내게 품 고 있던 애정의 결과로 비칠 만큼 순진무구한 기색이었고, 그 애정이 아이로 하여금 내게 호응하게 만들었다. - P31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너무나 명백했던 나머지, 다음 순간 나는 부인이 실수로 자신이 의도했던 이상의 말을 해버렸다는 느낌을 잊어버렸다. 나는 알고 싶었던 것만 물어볼 뿐이었다. - P33
내가 하는 일은 그분이 진심으로 원했기에 직접 요청한 것이었고, 또한 내가 이처럼 헌신할 수 있다는 건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기쁨을 주었다. 요컨대 나는 자신을 비범한 젊은 여자로 상상하였고. 이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리라는 믿음에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련다. 그렇다면 이윽고 최초의 징조를 던질 놀라운 일들에 의연히 맞서기 위해 자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 P39
이렇게 움직일 동안에도 그가 나한테서 한 치도 눈을 떼지 않고 있음을 나는 정말 강렬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이 움직이며 탑 위의 총안 하나하나를 어떻게 스치고 가는지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다른 구석에 잠시 멈추었다 돌아서려고 할 때조차 여전히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그는 몸을 돌려 사라졌고,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 P43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가 사라진 데 진심으로 안도하며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광경을 뇌리에 넣으며 나는 그에게 다시 나타날 시간을 주었다. 시간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이런 일들이 얼마나 지속 되었는지 이제 적절히 말할 수도 없다. 그런 계산 따위는 내게서 떠나갔음에 틀림없고, 그런 일들이 실제 내가 생각한 만큼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P51
아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자 나는 마음이 가라앉아 잠시 후 다음 일에 대처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 눈길을 옮겨 내가 마주쳐야 하는 존재와 대면 했다. - P72
여자는 다른 여자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듯이 부인 역시 나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은 내가 외로운 처지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주인이 눈여겨보지 않은 나의 매력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기막힌 계략을 꾸몄다고 생각하며, 나를 조롱하고 흥겨워하며 경멸했다. 부인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도 내가 그분을 섬기고 우리의 약정을 고수하는 것을 얼마나 자랑으로 삼는지 알지 못했다. - P116
나는 사실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지금까지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 좀 더 지체되었더라면 결국 내가 화를 내고 말지나 않았을까? 구원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끊어지면서 생긴 안도감에 불과하거나, 숨이 막힐 듯한 날에 갑자기 터지는 우레와 같다고 하더라도 나는 구원이라 부르리라. 최소한 그건 변화였고, 그 일은 순식간에 찾아왔던 것이다. - P124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다면 나의 곤경에 쉽사리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이 기회이며, 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등을 돌려 물러날 수 있다. 많은 하인들이 교회에 가느라 비우다시피 한 집으로 급히 되돌아가 몇 가지만 준비하면 끝날 문제였다. 요컨대 내가 필사적으로 도망간들 누가 책망할 수 있겠는가. - P134
그동안 나는 건너편 둑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감지하려는 듯이 여전히 경직되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나를 재앙에 빠뜨리기 위해 있는 존재와 다시 교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딱하게도 자신이 토 한 찌르는 듯한 앙증맞은 말 마디마디를 어딘가 외부로부터 빌려 온 듯 정확히 표현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완전한 절망감으로 나는 아이에게 슬픈 듯이 고개만 흔들었다. - P167
나는 분명히 그를 잡고 껴안았다. 내가 무슨 열정으로 그를 잡았는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윽고 나는 나 자신이 껴안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고요한 날 실내에는 우리 둘뿐이었고, 악령을 쫓아낸 그의 여린 심장은 고동을 멈추어 버린 것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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