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목소리인지, 어디서 불어온 목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다정하며 무구한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절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만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 P64
그렇게까지 욕망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틀니는 음식을 씹을 때마다 균열이 생긴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부서졌고 윤옥의 입안에는 딱딱한 가루가 돌았다. 미음이나 죽이 아닌 밥을 씹고 싶다는 욕망, 좋아하는 고등어의 맛을 음미하고 싶다는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모두에게 못할 짓 같았다. 아직도 환대를 기대하는 몸이라는 게 면구스러웠다. 몸은 쪼그라드는데 생에 대한 갈망은 누가 불어넣어주는 것일까. 윤옥은 마지막까지 궁금해했다. - P153
거센 빗줄기가 우리를 때리고 있었다. 우리는 꼼짝없이 어둠 속에서 그 비를 맞고 있었다. 자루 속 무언가가 미세하게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P271
내가 내팽개친 슬픔을 회수해야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때는, 그러니까 이십 년 전에는 말이지, 떠나야 했어. 살기 위해서는 한국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시간이 지나고 늙으면 다 무뎌질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거든. 그 말을 믿고 싶어서 그냥 믿어버렸어. 총기가 흐려지는 속도로 내안의 슬픔이 옅어지기를 바랐지. 운좋게 휘발된다면 더 좋을 테고. - P319
이모는 저무는 삶처럼 슬픔도 고통도 앙심도 감감해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딸의 얼굴이 뇌리에서 희미해지기를, 엄습하는 그리움도 무더지기를, 이모는 말했다. 그런데 새싹같이 파릇파릇한 슬픔이 매일 움텄다고, 눈을 질끈 감아도 암흔 속에서 유독 딸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고. - P319
어떤 슬픔은 다른 슬픔보다 확실히 가소로워. 새로운 땅에서 그렇게 많은 수치와 수난을 겪었지만 다 견딜 만했어. 이 땅에 돌아오는 것보다는 뭐든 낫다고 생각하면서 버티니까. - P319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은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쉽게 이해되기도 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얼음장 같은 현실에 몸을 담가야만 하니까. 그게 삶을 나아지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모가 본격적으로 고통을 견더보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그 슬픔을 잘 버텨내도록 곁에서 지켜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 P321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제 꿈이었어요. 처치 곤란인 적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간절해지고 싶었어요. 남아도는 그런 거 말고요.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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