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화, 아무 생각도 없는 평화, 아무 감정도 일지 않는 평화. 새로운 평화주의 자아는 내게 밖으로 나가라는 훈계를 하지 않았다. 집 안에 갇힌 나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술에서 막 깨어난 아침만 빼고. - P45

신경을 끈다는 건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 내 오감에 걸리는 상대의 모든 것은 무의미한 신호에 불과하다. 무의미한 것은 편안한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작은 공간에서 일상을 공유해야 할 때 가장 필요한 태도였다. - P73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병든 자도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영원한 천국. - P106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쿵 소리의 정체가 뭔지. 먼바다로부터 밀려온 유빙이 갯바위나 이미 밀려와 있던 유빙 덩어리와 충돌하며 내는 굉음이었다.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산산이 부서진 유빙 가루가 물보라처럼 솟구쳐 올랐다. 몰려온 유빙들은 직소 퍼즐을 맞추듯 해안가 전역에 얼음 벌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구동토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 P116

위험은 발견된 시점에 있었다. 입술이 퍼렇고, 몸의 근육이 굳어지는 중인데다 맥박이 느렸다. 저체온증이 심화되고 있는 단계 같았다. 내 얄팍한 의학 지식으로 그 이상의 상황 사정은 불가능했다. 사지를 주무르거나 살을 문질러 체온을 올리는 방법을 섣불리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중심 체온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빨리 따뜻한 곳으로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 P138

시간이 느릿느릿 갔다. 영원처럼 길고 절망처럼 고통스러운 침묵이었다. 나는 점점 작아져서 이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가 된 것 같았다. - P191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의 행로를 좇을 수도, 그에 대해 말해줄 사람을 찾아 나설 수도, 원망의 말을 쏟아낼 수도, 소리내어 울 수도 없었다. 내 안의 불길이 나를 태워도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소처럼 눈만 껌벅이며 누워 있었다.내게 허락된 것이 있다면 머릿속 세상을 여행하는 것뿐이었다. - P209

나는 담장 쪽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거칠었다. 숲속 어디가에선 밤새가 울었다. 바다에선 유빙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있다. 쿵,쿵..... - P231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불길에 휘감겨 있었다. 고개가 맥없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셔터가 닫히듯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시야가 하나의 선으로 닫히기 직전, 나는 심홍의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누군가를 봤다. 머릿속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 P346

그 이해가 왜 그리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우연에 의해 태어난다. 우연하게 관계를 맺고 우연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삶은 롤라 극장에나 존재할 것이다. - P390

인간관계란 상호 반응의 결과물이다. 내가 딱밤을 때리면 저쪽에서도 최소한 딱밤이 온다 처음엔 이상하다는 듯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도 곧 나와 비슷한 태도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서먹한 관계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서로 외면하는 사이가 됐다. 상대의 숨소리까지 읽으면서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상대와 근거리에 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직접 말을 걸지 않았다. 사적인 말은 물론이고 업무적인 대화조차 피했다. - P459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 P5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