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여러 모습일 수 있지만, 슬픔이 한심한 경우는 드뭅니다. 좋은 슬픔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P63
노인은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세상은 너무 시끄러운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소리들, 거칠게 튀어나오는 말들, 성난 목소리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테오는 가끔씩 이렇게 뜻밖에 찾아오는 불면의 순간들을 사랑하기도 했다. 그저 앉아서 침묵에 몸을 맡긴 채 마음이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에 길고 사연 많은 자신의 삶에서 기억을 끌어내고 지나간 장면을 하나씩 재생시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어린 시절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떠오를지, 성인이 되어 살았던 어떤 장소가 생각날지, 과거의 어떤 고뇌나 황홀함이 되살아날지 혹은 미래를 향한 어떤 희망이 마음속에서 피어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의 항상 분수대의 잔잔한 물소리와 밤의 고요가 그를 어르고 달래 잠으로 이끌었고, 그는 저항할 새도 없이 천천히 꿈속으로 가라앉았다.
- P136
삶은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만 한다. 비록 완전히 새로운 삶, 슬픔에 종속된 삶,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슬픔이 따라오는 삶이라고 해도 계속되어야 한다. 테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생각이 더 단단히 자리 잡게 했다. - P155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좋은 예술‘ 을 정의하는 건 더 어렵죠.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좋은 작품이 아니라 좋은 반응만 있는 걸지도요.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예술 작품이 익숙한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해주거나, 우리가 느껴왔어야 할 감정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게 해준다거나, 우리가 이 세상 속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면, 그런 작품이 ‘좋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예술이 지닌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 P182
‘좋은 예술‘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좋은 예술은 아이에게서도, 거장에게서도 나올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요. 이런 관점은 비평가들, 특히 현대 비평가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무엇이 예술로서 정당한지, 무엇이 가치 있고 없는지, 그걸 자기들이 정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 하죠. - P183
어떤 것이 좋으려면 말이죠.정말로 좋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 말의 의미를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게 믿게 됩니다. 재능 자체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리는 대상이나 들려주는 이야기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각이든 농사든 교육0이든 법률을 제정하는 일이든 의술이든 음악이든 아이를 키우는 일이든 그 핵심에, 그 심장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능숙하고 잘 팔리고 인기 있어도,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핵심에 사랑이 없다면 어떤 것도 본래 있어야 할 모습 그대로일 수 없죠. - P183
그들은 다시 의자에 앉았고 그다음 몇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단어나 문장이 또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고,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이야기의 강이 흘렀다. - P193
나이가 들수록 저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게 있어요. 이 세상이 알게 되는 모든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지금껏 살았던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접적인 건 아닐지 몰라도, 절대적 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쩐지 우리는 세상의 모든 상처를 함께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 P232
나는 이 미소에서 소년을 봤어요. 아직도 자기의 장난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얼굴이지요. 아이들이 끌릴 것 같은 얼굴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한 남자도 보입니다. 이 눈 속에 지혜로움 담겨 있다고, 나는 믿어요. 젊은 사람의 다정, 늙은 사람의 성숙이 다 있어요. 두 개는 참 좋은 조합이지요. 지혜와 유쾌, 이 얼굴에는 성인이 될 가능성도 보입니다. - P258
빛과 색의 미묘한 변화에 민감했던 어린 소년 테오에게 초저녁의 아름다움은 마법처럼 느껴졌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성스러움이라는 감정을 아직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그런 감정을 완벽히 설명할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 P263
내 나이쯤 되면 누구나 슬픔의 전문가라 말할 수 있겠죠. 젊을 때는 바쁘거나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느라 잘 보지 못하지만, 거의 아흔에 가까워지면 이 세상의 슬픔이 꽤 깊이 새겨져 있어요. 매주 어디선가 비극이 일 어나고, 이 세상에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하게 하는 사건들이 찾아오거든요. - P317
많이 다치고 아파하고 무너지다 보니 슬픔에 대해 전문성을 갖게 된 거랄까요. 하지만 이 슬픔도 하나의 선물이라는 걸 깨닫고 있어요. 슬픔과 같이 살아가고, 슬픔을 받아들이는 일이 삶에 슬픔이 없는 척하는 것보다 휠씬 쉽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서로 잘 어울리며 공존할 수 있다는 것도 삶의 다른 신비지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그러니까 천국의 안쪽이 아니리 바깥쪽인 이곳에서는, 기쁨과 슬픔은 서로가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 P317
자신의 슬픔을 과시하는 것도 미덕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지혜는 아니죠. 슬픔을 잘만 보듬고 쓰다듬어 준다면 그 안에서 큰 사랑이 자랄 수 있는 아름다운 가능성은 언제나 있어요. 슬픔은 우리를 쓰라리게 만들 수도, 지혜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요. - P318
우리는 슬픔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만, 솔직히 마음 저 깊은 곳에 채워지지 못한 갈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의 초상화는 사람들이 혼자서, 고요히,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도록 만들어요. 그 갈망을 인정하고 슬픔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도록 해쥐요.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 P319
세상에는 정의도 있고 자비도 있단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면 나는 늘 자비 쪽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구나. 혹여 실수하더라도 자비를 베풀다 실수 하는 것이 낫다. 잘못된 자비는 잘못된 정의만큼 사람을 아프게 하진 않아. 그리고 항상 기억해라. 하나님의 눈은 다 보고 계신다. - P373
아무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유죄를 인정했어요. 물론 검사님은 그런 말을 허구한 날 들으시겠죠. 진짜 죄 지은 사람들도 자기들은 결백하다고 할 테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답니다. 검사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나쁜 놈들 어지간히 많이 상대하시는 거 알지만, 가끔은 사람 얼굴을 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얼굴 안에 진짜 사람이 있습니다. - P377
어떤 의미에선 큰 실수였지. 아니야, 내 인생의 사랑은 아내가 아니었어. 그 사람과는 오래가지도 못했지만 그 여자는 내 심장을 가져가 버렸지. 아마 사람 인생에 그런 사랑은 평생 한 번뿐일지도 몰라. 그게 가슴을 부숴버리더라도. - P407
우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며 살아갑니다. 길고 굽이진 길, 파멸로 향하는 길, 안락한 길, 남들이 가지 않은 길. - P511
우리는 이제야 테오라는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그렇게 아름답게 하나로 엮어낸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궁극적인 것과 가까이에 있는 것, 넓은 은총과 좁은 길, 이 모든 것에 그렇게 헌신하며 살아간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 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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