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어디든 경무부와 형사부 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의무인 양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으로는 서로 무시하며, 뒤에서는 험담한다. 하지만 ‘반목‘이 반드시 ‘대립‘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같은 경찰관이고, 양 즉 관계성이 희박한 까닭에 실제로 충돌이 일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 P135
살아있다. 살아 있으니까 찾지 못하는 것이다. 몰래 숨어 있을 뿐이다.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숨어 있으니 찾지 못할 수밖에. 아이는 숨비꼭질이며 술래잡기를 하자고 자주 졸라댔었다. 쉬는 날이면 강아지처럼 달려들곤 했다. - P156
게임판 위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말. 그들은 확실히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다. 부딪칠 것인가. 아니면 한쪽이 사라질 것인가. 하지만 아직도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길 수는 있는 걸까. 승리란 대체 무엇 일까. - P189
용서 못 해요. 아들을 그런 잔인한 사건 한가운데 던져놓은 것도 모자라. 실수 한 번 했다고 무능한 인간 취급이나 하고 당신들한테는 가족도 없어요? 경찰은 원래 그런 데예요? 귀하게 키운 부모 심정을 헤아려봐요 애는 만신창이가 됐고, 인생도 엉망이 됐어요.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책임 질 거예요? - P206
현재 드러난 죄는 더욱 무겁다.해묵은 상처가 아니다. 인식해야 하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한 상처를 붕대 밑에 감추고 있는 현실이다. 일급 유괴 살인 사건에서 만회할 수없는 과실을 저질러놓고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십사 년 동안이나 계속 세상 사람들을 속여왔다. 만일 이 사실이 지금 언론에 유출되어 뉴스로 보도된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녹음 실수는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 해도 실수일 뿐이지만, 은폐는 작위적이다. 그뿐 아니라 실수를 감추기 위해 범인에게 전화가 온 사실까지 숨기고, 사건의 근간을 이루는 수사 정보를 없애버렸다. 수사기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범죄 행위다.스스로 수사 과실을 공표했을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거센 비난을 받게 되리라. - P255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녀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비치는지 알 것 같았다. 거울도 사진도 아닌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 - P281
지금 상황을 한탄하고 있다. 스스로를 동정하고 있다. 그래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기대했다. 가족을 위해 움직이겠다고 맹세했다. 형사부 복귀도 포기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건 아니었다. 그런 경지에는 한 참 미치지 못했다. 마음은 여전히 두 갈래였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끙끙대고 있다. 자기 연민에 푹 젖어 직무의 의미조차 잊고 있었다. 한심하다.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한심한 놈일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가슴속에서 뜨거운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 P293
잠깐의 우연이 평생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이 진리이리라.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그 자리에서 어떤 직책을 맡을 것인가. 갖가지 이유와 내력을 말할 수 있어도 수많은 우연이 작용한 끝에 현재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 P306
형사라는 직업은 인생에서 투명 망토 같은 역할을 한다. 편한 직업이 아니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사의 고생과 고뇌와 비애는 과잉 공급된 소설과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은 누구나 알게 되어버렸다. 형사라고 소개하면 상대는 어련히 알아듣는다.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게다가 형사는 현실의 고생도 고뇌도 비애도 쉽게 뒷전으로 미뤄둘 수 있다. 항상 쫓아야 할 사냥감이 있는 까닭이다. - P318
이성은 차치하고, 범죄를 증오하는 본능은 형사에게 없다. 있는 건 범인을 사냥하는 본능뿐이다. 범인을 색출해 궁지에 몰아넣고 자백을 받아낸다. 반복되는 일상에 개인의 사고방식은 빛깔을 잃고, 무디게 빛나는 형사의 빛깔로 물들어간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외려 자진해 그 빛깔에 몸을 담근다. 사냥은 생활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사냥터에 남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유일한 취미이자 최고의 오락거리이기도 한 까닭이다. - P318
어떤 조직에서든 직책은 중요합니다. 빼앗길 처지에 놓이면 지키려 애쓰는 법입니다. 사전에 한마디 말도 없이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 P390
무슨 일을 당해도 참았다. 가족을 위해.... 아니. 가족을 총알받이로 삼았다. 제 한 몸이 소중했다. 조직 내에서 입장이 난처해질 때마다 가족을 핑계 삼아 인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알고 있었다. 가정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조직에서 제자리를 잃으면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 그런 자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숨을 거둘 때까지 스스로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 P399
넌 어쩔 거냐? 어쩌고 싶은데? 말할 것도 없다. 형사부장직을 지키고 싶다. 머리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는 들끓지 않았다. 마음은 반반이었다. 딜레마의 감옥에 갇혔다. 이제 와서 가족을 찾는 건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걸까. 어찌 되었든 형사부의 패배는 확정적이다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것이다. 그런 치졸한 생각이 갈등을 불러왔을까. 그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전의를 상실하고 백기를 든 건가? 형사부에서도, 경무부에서도 마음이 떠난다는 건 진정 무국적의 인간이 돼버렸다는 뜻인가. 아니....무국적은 아니다 . 직책이 있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렸지만 머릿속에서 홍보담당관이라는 자의식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지금 현실도 그랬다. - P402
모르겠나? 경찰이란 저 혼자서는 똑바로 돌아갈 수 없는 조직이야. 부패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점점 더 썩어가고 있어. 기자들이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라 해도,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단절되어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네. - P419
자네가 자책감을 느끼는 건 당연해. 제대로 된 인간이란 증거지.하지만 홀로 조직 전체의 책임을 짊어질 필요는 없네.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주제넘은 생각이야. 우리 모두 똑같이 책임져야 해. 수사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그 아픔과 죄책감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말일세. - P443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분명 살아 있다. 그렇고말고. 이제 곧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벌써 저기까지 왔다. 그래, ‘누군가‘와 함께...... - P633
조직에서 이기는 건 그런 이들이다. 비밀을 흘리지 않고 오롯이 가슴에 품은 이들이 살아남는다. 자신의 비밀을, 남의 비밀을 입 밖에 낼 때마다 패배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 P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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