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은 구름 무리가 잽싸게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구름이 밀려오는 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텅 빈 백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구름을 바라보는 건, 때로 명상과 닮아 있었다. 잡다한 생각이 구름 모양에 맞춰 조금씩 다듬어지고 가라앉다가 이내 사라졌다.

- P56

이야기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가의 말이, 뮈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그러나 지워지지 않을 듯한 자국처럼 남았다.

- P68

한강 위로 떠오른 새하얗고 동그란 달이 강건너편의 굴뚝에서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떠 있는 구름과 어우러져 그림책의 한 장면 같았다.

- P93

그녀는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오래된 상처를, 누군가는 잊고 있던 희망을 문장에 담고 있었다. 그 순간, 윤슬은 깨달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험을 쌓으며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타인이지만, 문장을 나누는 시간만큼은 ‘이야기‘라는 세계 안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된다는 사실을. 다들 하늘을 떠다니다 사라지고 마는 구름 같은 마음을 한 조각씩 간신히 붙잡아 문장을 써냈다는 사실도.

- P99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편지를 넣은 작은 유리병을 망망대해에 띄우는 일과 닮았다고 윤슬은 생각했다. 그 유리병이 어디로 떠밀려갈지, 가라앉을지, 폭풍우를 만나 깨져버릴지, 바다 어디까지 가닿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째면 이야기 역시 바다를 떠도는 유리병처럼, 눈앞에서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다 이래 어디론가 떠나는 건 아닐까. - P100

터무니없는 상상을 거리낌 없이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잊고 지냈던 감각 하나가 되살아났다. 바로 마음껏 상상할 때만 느낄 수 있었던 기쁨이었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장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정글짐 위에 올라서면 그곳은 우주가 되었고, 구름사다리는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곤했다. 그때는 그런 상상의 실현 가능성을 굳이 의심하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언제부턴가 그런 충만한 감각을 잊은 채, 상상하는 일 자체를 미뤄두고 살아온 것 같았다.


- P109

심장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자, 각자의 마음속에서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이야기의 씨앗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 P126

감정과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뒤엉켜 있었지만, 어쩌면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는지도 몰랐다. 우리의 삶이 늘 그렇듯, 매끄럽게 흘러가는 순간은 좀처럼 없으니까.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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